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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무엇을 보고 나왔는가: 연극 〈마우스피스〉, 재현의 윤리와 극장의 자기모순에 대하여

Sangha Park

Sangha Park

2026. 06. 26 15:26Views 15

"연극이 뭔데요?”

데클란의 질문 앞에서, 나는 내가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연극이 해체되는 감각을 느꼈다. 그 질문이 날카로웠던 건, 대답이 없어서가 아니라 내가 가진 대답이 너무 많아서였다. 그리고 그 많은 대답들이 전부 조금씩 수상했기 때문이다.


비극의 문법, 혹은 관습의 나태함

왜 사회적 이슈를 다루는 연극 속, 무대 위에서 살아 숨 쉬던 인물이 마지막에 기어코 죽어야 할까.

수많은 희곡을 읽고, 연극을 보면서 가지게 되었던 의문이다.

대답은 단순하다. 그래야 자극적이고, 그래야 비극적이며, 그래야 충격을 받은 사람들이 그 이슈를 심각하게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창작자들은 안다. 고통이 극대화될수록 관객의 눈물샘이 열리고, 눈물샘이 열릴수록 공감받았다는 감각이 극장을 채운다는 것을. 눈앞에서 살아움직이는 캐릭터, 즉 배우를 보고, 듣고, 함께 호흡하였기에, 그 죽음은 글로 읽힐 때보다 무대에서 더 큰 충격을 줄 수 있다. 가장 전통적이고, 가장 간편한 충격 요법인 것이다.

그런데 정말일까.

극장을 나선 우리는 그 모든 것을 보고 나서, 문제를 충분히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는가. 공연을 즐겨보는 관객층에서 농담처럼 도는 말이 있다. "캐스팅 보드가 영정사진이다." 어쩌면 웃기지 않은 말이다. 특히 사회 문제를 다루는 연극이라면, 그리고 주인공이 취약계층이면, 누군가의 죽음은 이미 예정된 수순처럼 느껴질 정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죽음은 — 무대 위 허구의 죽음은 — 실제로 그 지옥 같은 삶을 살아내고 있는 사람들의 세계와 어딘가에서 연결되어 있다. 그들의 고통과 죽음은, ‘서사적 장치’라는 재료로 사용되어 마땅한가?

누군가의 고통을 재료로 삼아 감동을 빚어내는 것. 예술이라는 이름 아래 그것이 정당화될 때, 우리는 그걸 '불행 포르노'라고 부르기도 한다. 극도 그 혐의에서 자유롭지 않다. 〈마우스피스〉는 오히려 그 혐의를 정면으로 끌어안으면서 묻는다. 그 혐의를 지운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가, 라고. 문제 제기의 대상이 되는 그 작품들과 같고도 다른 문법을 품었다.


연극 <마우스피스> 공연 장면, 연극열전. ©The Best Plays
연극 <마우스피스> 공연 장면, 연극열전. ©The Best Plays


극장은 누구를 위해 고여가는가

"이런 곳은 모두를 위한 곳이야.”

리비의 말을 들으며 나는 잠깐 멈칫했다. 그 말 자체가 틀린 건 아니다. 모두를 위해 예술을 열어놓은 곳도 분명 존재한다.

그러나 데클란이 마주했듯, 극장은 ‘이런 곳’에 해당하지 못한다. 점점 올라가는 티켓 가격, 특정 취향의 마니아층이 공유하는 감수성, 그리고 그 공간에 닿기 위해 필요한 여러 조건들을 생각하면 — 극장이 정말로 '모두를 위한 곳'인가라는 질문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딸깍 몇 번이면 어디서든 이야기를 볼 수 있는 지금, 굳이 이 물리적인 공간에 비싼 값을 치르고 앉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 이유를 스스로 정당화하기 위해 우리가 극장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건 아닐까. 리비가 연극을 "거대한 공감 기계"라고 부를 때, 극장을 사랑하는 관객들이 거기에 쉽게 공명하는 것은 — 어쩌면 그 공명 자체가 이미 취약한 무언가를 드러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극장은 점점 고여간다. 그리고 고인 물 안에서는, 비판적 사유보다 자기 확인의 욕구가 더 빠르게 자란다.


연극 <마우스피스> 공연 장면, 연극열전. ©The Best Plays
연극 <마우스피스> 공연 장면, 연극열전. ©The Best Plays


누군가의 삶을 가져다 쓸 때

실화를 바탕으로 한다는 것의 선은 어디까지인가.

누군가의 삶을 예술의 언어로 번역할 때, 창작자에게는 어떤 책임이 따르는가.

‘실화 바탕’이라는 말이 하나의 마케팅 포인트가 되고, 관객들의 감상을 극대화하는 데 사용되기도 한다는 점에서, 창작에서의 윤리를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리비는 데클란을 사랑했다고 생각한다. 진심으로. 그러나 그녀는 데클란이라는 구체적인 인간보다, 연극을 더 사랑했다. 그리고 연극을 통해 증명될 자기 자신을 더 사랑했다. 그 사랑의 서열이 문제였다. 그 마음에 악의는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더 무섭다.

선의로 포장된 착취는, 착취라는 사실을 오래도록 인식하지 못하게 만든다. 리비가 끝까지 자신이 옳다고 믿을 수 있었던 건, 그녀의 동기가 순수했기 때문이다. 순수한 동기가 결과의 폭력성을 지우지는 않는다. 그런데도 우리는 종종 그렇게 착각한다. 지워지려 하던 폭력성을, 무대 위, 그리고 모자를 눌러쓰고 내려온 객석에서, 데클란이 우리에게 눈 크게 뜨고 보게 만든다.


연극 <마우스피스> 공연 장면, 연극열전. ©The Best Plays
연극 <마우스피스> 공연 장면, 연극열전. ©The Best Plays


우리는 그들과 다른가?

이번 프로덕션의 연출은, 리비를 연민받아 마땅한 인물로 바라보게 유도한다. 나는 그 선택이 옳다고 생각한다. 리비를 단순한 악인으로 만들어버리는 순간, 관객은 편안해진다. 나는 저런 사람이 아니니까, 라고.

그러나 리비를 이해 가능한 인물로 남겨두면, 불편함이 객석까지 기어들어온다. 

마지막까지 데클란을 비극 속으로 밀어 넣는 리비의 이야기는 정당화될 수 있는가. 아니다. 그 이야기를 티켓 값을 내고 앉아서 관람하며 '공감했다'는 감각을 가지고 나온 우리는, 리비와 다른가. 역시 아니다. 연극을 사랑하는, 소비하는 우리의 시선은 리비와 닮아 있다.

리비는 데클란의 삶에 침입해 고통을 예술의 언어로 번역했다. 관객은 그 번역본을 극장에서 세련되게 소비했다. 둘 다 데클란의 고통으로부터 무언가를 얻었다. 그 거래의 구조는 곱씹을수록 비슷하다.

〈마우스피스〉가 불편한 건, 무대 위에서 벌어지는 일 때문이 아니다. 그것이 객석에서도 벌어지고 있고, 이후 우리가 보러 갈 또다른 작품, 또다른 무대에서 재생산될 것이라는 점 때문이다.


연극은 정말 거대한 공감 기계인가? 우리는, 진짜 ‘공감’을 하고 있는가?

연극은 우리가 안전한 어둠 속에서 타인의 고통을 바라보며, 그것을 '공감'이라 부를 수 있는 장치인지도 모른다. 


연극 〈마우스피스〉가 안전장치의 혐의에서 자유로운가,를 질문한다면 역시 아니다.

그러나 이 작품은 그 혐의를 뒤집어쓴 채, 연극의 형식에 안주하지 않고 객석으로 불편한 질문을 아낌없이 던진다. 그렇게 관객은 ‘거대한 공감 기계’ 속을 스스로 들여다본다.

그것이 이 극의 가장 정직한 성취라고 생각한다.


Sangha P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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