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Figurentheater 무대 위, 한국인 배우 ‘이수비’를 만나다
한국어로 번역된 단어조차 마땅치 않은 장르가 있다. 독일어로 '피구렌테아터(Figurentheater, 이하 ‘물체극’)'. 흔히 인형극, 가면극, 오브제극, 비주얼 씨어터 등으로 파편화되어 불리는 이 장르를, 배우 이수비는 '물체극(物體劇)'이라 부른다.
정극이 촘촘한 언어와 대사로 모든 상황과 서사를 설명하는 데 주력하는 반면, 물체극은 말 너머의 차원에서 관객과 소통한다. 조종자의 모습을 숨긴 채 인형을 진짜 '사람처럼' 완벽하게 보이도록 테크닉과 호흡을 계산하는 전통적인 인형극(Puppentheater)과도 달리, 이수비 배우가 선보이는 현대적 물체극은 사물이 '인간이 되려고 애쓰는 것'을 지향하지 않는다. 무대 위 퍼포머는 인형 뒤로 가려진 조종자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자기 자신’으로 존재한다. 손에 들린 레몬, 찻잔, A4 용지, 알루미늄 호일 같은 일상의 물건(Gegenstände)과 재료(Material)들은 배우의 소품이 아닌, 서로 호흡을 주고받는 대등한 ‘연기 파트너(Spielpartner)'가 된다. 표정도 대사도 없는 사물의 물성(Materiality)과 배우의 신체가 만나 예기치 못한 우연을 만들어낼 때, 관객은 비로소 자신의 삶과 경험을 대입해 무대 위 여백을 상상력으로 채워 넣는다.
독일 슈투트가르트 국립 음악 및 공연예술대학(HMDK) 에서 물체극(Figurentheater)를 전공하고 , 신작〈Nach Zitrone schmeckt die Welt〉(세상은 레몬 맛)〉로 슈투트가르트 FITZ 극장 무대를 노랗게 물들인 한국인 배우 이수비. 온전히 ‘나’로 서는 무대 위, 배우와 사물이 나누는 무언의 대화속으로 기꺼이 초대받아 그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레몬이 춤을 추고, 우연이 웃음을 만든다
검은 옷을 입은 두 퍼포머가 무대 위에 서 있다. 어두운 무대 위, 눈에 띄는 색깔이라곤 오직 파란색 책상과 그 위에 올려진 쨍한 노란색 레몬 한 알뿐이다. 두 사람이 갑자기 레몬의 상큼하고 찌릿한 냄새를 흠씬 들이마시며 작품이 시작된다. 평범하고 정갈한 차 파티가 열릴 줄 알았던 공간은 순식간에 예측 불가능한 상상력의 장으로 변모한다. 어느 순간 노란 레몬에 눈에 보이지 않는 팔다리가 돋아난 듯 무대 위를 데굴데굴 뒹굴며 두 퍼포머와 격렬한 싸움을 벌이기도 하고, 레몬을 자르려는 칼을 막아서다 삐지고 토라지기도 한다. 급기야 이 엉뚱한 레몬은 밤하늘 가로등 밑으로 걸어 들어가 신나게 춤을 추며 'Singin' in the Rain'을 부르기 시작한다. 레몬 특유의 상큼함과 신맛, 그리고 그로 인한 유쾌한 폭소가 객석 전체로 전파되는 무대.〈Nach Zitrone schmeckt die Welt〉가 선사하는 생생한 무대 풍경이다.
Q. 신작 〈Nach Zitrone schmeckt die Welt〉는 두 배우가 찻잔과 레몬으로 펼치는 엉뚱하고 유쾌한 40분간의 무대입니다. 이 작품의 구체적인 창작 계기와 비하인드가 궁금해요. 또 대사가 거의 없는(kaum gesprochen) 비언어 형태를 선택하신 이유가 궁금합니다.
"처음부터 ‘레몬으로 아이들 공연을 만들어야지!’ 하고 정교하게 기획해서 출발한 건 아니었어요. 시작은 학부 시절 떠올린 ‘인형머리와 살아 있는 손의 조합’이라는 단순한 아이디어였죠. 동료 에바(Eva Mario Hasler)가 이 조합을 무척 마음에 들어 했고, 저희는 두 명의 인간 퍼포머와 몸 없이 떠돌아다니는 머리 하나, 그리고 그 머리의 몸이 되어주는 손으로 짧은 공연 〈고독한 머리씨〉를 만들었어요. 이후 졸업을 앞두고 이 작품을 더 길게 확장해 보자고 뜻을 모으면서 본격적인 창작에 들어갔죠. 이 과정에서 기존 작품의 ‘머리’ 역할을 레몬으로 바꾸게 되었어요.
처음엔 식문화나 요리 과정을 주제로 다루려 했어요. 테이블 위에 파프리카, 샐러드, 배추, 포크와 젓가락까지 수많은 일상 재료를 올려두고 실험했죠. 하지만 여러 창작 동료를 모아 피드백을 듣고 재료를 하나씩 덜어내는 과정을 거치며 '우리가 진짜 끝까지 갖고 가고 싶은 단 하나의 재료가 무엇인가?'를 물었을 때, 답은 레몬이었어요. 이유를 정확히 설명하긴 힘든데, 레몬에게 자꾸 끌리고 눈이 갔어요. 그렇게 수많은 재료 중에서 레몬이 끝까지 남아서 주인공이 된 거예요.
처음부터 한국을 포함해 세계 어디든 콤팩트하게 이동하며 무대에 올릴 수 있도록 논버벌(Non-verbal) 형태를 염두에 두었어요. 물론 물체극에서 언어가 언제나 배제되는 것은 아니에요. 언어 역시 하나의 소재이자 재료가 될 수 있거든요.
하지만 무대 위 상황을 일일이 대사로 설명하는 방식은 지양해요. 사물의 움직임만으로도 관객이 스스로 서사를 연결해 내는 힘이 있기 때문이에요.”
Q. 무대 위 레몬이 눈이나 입이 달린 인형이 아닌 과일 자체인데도 깊은 생명력을 발산해요. 사물에 생명력을 부여할 때 배우로서 어디에 집중하시나요?
"많은 분이 사물을 다룰 때 사람처럼 눈을 만들거나 인간의 형상으로 묘사하려 하지만, 저는 ‘물체가 인간이 되려고 애쓰지 않는다’는 점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요. 레몬은 그냥 레몬 그 자체예요. 대신 노란 색감, 상큼한 향, 찌릿한 맛, 튀어 오르는 즙 같은 오감의 물성에 집중하죠. 사물 자체의 특성을 중립적인 시각으로 지켜보며 함께 놀아주는 거예요.
무엇보다 중요한 건, 배우인 나 자신 역시 인형 뒤로 숨거나 거창하게 다른 누군가를 흉내 내지 않는다는 점이에요. 가식 없이 있는 그대로의 '나 자신으로 무대 위에 서서 사물과 대등하게 소통하고 교감하는 거죠. 그렇게 나 자신으로 사물과 진짜 호흡을 주고받을 때 제 안에서 자연스럽게 터져 나오는 생생한 감각과 감정들, 바로 그 '진짜 감각'을 바탕으로 무대를 이어가기 때문에 사물과 무대 위에 비로소 진짜 생명력이 피어나는 것 같아요. 내가 내 모습 그대로 존재하며 사물과 교감하고, 그 자체로 인정받고 사랑받는 경험이 퍼포머로서 정말 커다란 자유로움을 느껴요.
그렇기 때문에 물체극은 더더욱 '현장성'이 절대적인 장르예요. 특히 테이블 작업에서는 머릿속 계산만으로는 어디서 생명력이 튀어나올지 전혀 예상을 못 하거든요. 무대 위에서 사물과 직접 만나 계속 부딪치고 교감해보면서 비로소 생명을 만들어가는 거죠. 그렇게 연습실에서 사물을 이렇게 저렇게 건드려보다가 예기치 못한 우연이 터져 나오는데, 우연성은 늘 희극성을 담보하거든요. 비록 비극적인 상황일지라도 예상치 못한 우연이 발생하는 순간 인간은 풋하고 웃음을 터뜨리게 돼요. 무대 위 현장에서 터져 나온 그 어이없고 유쾌한 우연들이 모여 이 무대가 완성되었어요."
Q. 함께 작업한 'Babák-Kollektiv'의 멤버 소개와 함께, 이번 작품에서 각자 어떤 역할을 맡으셨는지 궁금해요.
“정통 연극에서는 연출이 중심을 잡고 계획을 이끌어가는 식의 역할 분담이 분명하지만, 물체극에서는 모두가 배우이자 창작자인 경우가 많아요. 매 프로젝트마다 각자의 역할과 포지션도 유연하게 달라지죠. 저희는 크레딧에 ‘연출(Regie)’ 대신 ‘Outside Eye(Außenblick, 외부 시선)’만 적는 경우도 많아요. 무대 밖에서 전체적인 그림과 흐름을 살피는 역할인데, 연습실에서 하는 일은 연출과 비슷해요. 그렇다고 둘이 완전히 같은 말은 아니에요. 역할의 강도만 다를 때도 있고, 서로 섞이기도 하고, 명확하게 나뉘기도 하죠.
이번 작품에서 연출을 맡은 노라(Nóra Vermes) 역시 연습실에서 아이디어가 끊임없이 터져 나와 혼란스러워질 때, ‘먼저 시도해 볼 아이디어를 선택하는 사람’ 정도의 권력을 가졌다고 보면 돼요. 원래 노라는 인형극 무대미술을 전공한 창작자로, 필요하면 직접 연기도 하고 무대도 만들어요. 각자 더 좋아하고 중점을 두는 분야는 있지만, 저희 모두 마찬가지예요.
저와 함께 이 공연을 처음부터 만들어 온 에바(Eva Mario Hasler)는 무대 위에서 함께 연기하는 퍼포머이자, 행정과 홍보, 펀딩 등 공연을 만드는 데 필요한 다양한 기획 업무도 도맡고 있어요. 사운드와 드라마투르기를 맡은 카밀라(Camilla Krause) 역시 원래 바이올린을 전공했는데, 이번 작품에서는 사운드와 포스터 디자인, 작곡까지 맡은 전방위 창작자예요. 이번 작품의 엔딩곡도 직접 만들었어요!
이렇게 각자 하던 일을 넘나들며 함께 무대를 만들 수 있다는 게 저희 작업의 가장 건강한 창작 동력이에요.”
대사를 넘어 몸으로, 한국에서 독일까지
공연창작집단 ‘뛰다’는 2001년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졸업생들이 결성해 2021년까지 활동한 단체다. 인형과 가면, 신체극의 방법론을 바탕으로 배우 신체의 물체성과 사물의 생명력을 집요하게 탐구해 온 ‘뛰다’는 강원도 화천 예술텃밭을 거점으로 지역 주민과 함께하는 작업을 펼치는 한편, 다양한 워크숍을 통해 국내외 예술가들이 교류하며 단체의 메소드를 공유하고 함께 탐구하는 장을 마련해 왔다. 2014년 열린 움직임 워크숍 〈오브제로서의 몸, 몸으로서의 오브제〉도 그중 하나다. 뛰다의 메소드를 바탕으로 인형과 가면, 신체 언어를 중심으로 배우 신체의 물체성과 사물의 생명력을 탐구한 이 워크숍은 이수비 배우에게 새로운 연극적 가능성을 발견하는 계기가 되었다.
성균관대학교에서 독문학과 중문학을 공부하고 2010년부터 연극과 매체 연기를 해온 이수비는 우연히 이 워크숍에 참여했다. 당시 그에게 익숙했던 것은 대사와 화술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달하는 연극이었다. 하지만 인형과 가면, 오브제를 활용한 작업을 처음 경험하면서 무대 위 몸과 사물이 지닌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했다. 모든 상황을 대사로 설명하지 않더라도 호흡과 움직임, 사물의 감각만으로 관객의 상상력을 움직일 수 있다는 사실에 깊이 매료된 것이다.
그 경험은 그가 한국을 떠나 독일로 향하는 계기가 되었다. 지금은 한국과 독일을 오가며 자신만의 시선으로 무대를 만들어가고 있는 이수비. 몸과 사물, 그리고 그 사이에서 피어나는 연극적 가능성을 발견했던 순간부터 이어진 그의 여정을 들어보자.
Q. 독문학·중문학 전공 후 한국에서 연극 활동을 하시다가, 독일로 유학을 떠나게 된 이야기를 자세히 듣고 싶어요.
"저는 아주 어릴 때부터 배우가 꿈이었어요. 대학교 수업엔 큰 흥미를 못 느꼈죠. 졸업 후에는 극단 활동을 시작으로 배우로 활동해왔어요. 매체 연기도 경험해봤지만, 매체보다는 무대를 늘 더 좋아했어요.
그러다 2014년 화천 극단 '뛰다'에서 열린 2주간의 숙식 워크숍에 참여하게 되었어요. 주제가 '오브제로서의 몸, 몸으로서의 오브제'이었는데, 거기서 가면과 인형, 오브제를 처음 접하고 엄청난 충격을 받았어요. 모든 상황과 인물의 전사를 대사로 다 설명해야 하는 정극과 다르게, 인형과 가면은 아무런 표정 변화가 없는데도, 배우의 신체와 만나 호흡이 불어넣어지는 순간, 관객 각자의 상상력으로 그 여백이 채워지는 거예요. '언어로 다 말하지 않아도 되는 무대', 머리가 아닌 몸에서 거꾸로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의 방향성에 완전히 매료되었죠. 이 연극을 진짜 깊이 있게 전공해보고 싶어서 독일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Q. 그렇다면 배우님이 몸소 경험하신 독일 컨템포러리 물체극만의 매력은 무엇인가요?
"퍼포머와 사물 사이의 관계성, 그리고 관객의 상상력이 들어설 여백이 있다는 거예요. 전통 인형극이 퍼포머를 가리고 인형만을 강조했다면, 컨템포러리 물체극에서 퍼포머는 인형 뒤로 숨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자기 자신으로 무대에 서서 사물과 대등하게 호흡하죠. 그래서 우리(나와 물건)의 관계 속에 당신(관객)이 놓여져요. 퍼포머와 사물이 대등하게 교감하며 여백을 만드는 순간, 관객들은 자신이 살아온 본인만의 역사를 대입해서 그 공간을 상상으로 채워 넣게 되거든요. 예를 들면 퍼포머와 사물의 어떤 교감을 보고 관객은 10년 전에 느꼈던 감정을 찰나의 순간에 다시 떠올리면서 이 무대와 능동적으로 관계 맺게 돼요. 이게 물체극이라는 장르가 가진 독보적인 매력이에요."
아이의 직관으로 어른의 삶을 묻다
공연장을 가득 채운 어린아이들이 사물의 엉뚱한 움직임에 깔깔거리며 폭소를 터뜨릴 때, 물체극이 가진 직관의 힘은 선명해진다. 흔히 아동극이나 인형극을 두고 ‘어린아이들이나 보는 가벼운 장르’라 치부하지만, 이수비 배우는 오히려 어린이 관객을 ‘관객계의 최종 보스’라 칭한다. 거추장스러운 지적 포장 없이 본질을 단번에 꿰뚫는 아이들의 직관이야말로 연극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높은 경지라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졸업작품이자 데뷔작인 〈Alles Gute – K(l)eine Antworten auf eine große Frage(세상의 모든 좋은 것들)〉에도 고스란히 담겨 있다.‘다 큰 어린이들을 위한 오브제극’을 표방하는 이 작품은 좋은 사람이란 무엇인지, 과연 좋은 삶이란 어떤 모습인지를 A4 용지와 행주, 곰돌이 젤리 같은 일상적인 사물을 활용해 유쾌하게 질문한다. 언어와 문화의 장벽을 넘어 자신이 믿는 물체극의 본질을 무대 위에 펼쳐낸 이 작품은 2024년 독일 에를랑엔 국제 물체극 페스티벌에 초청돼 8회 공연을 올렸고, 2026년에는 스위스 Figura 물체극 페스티벌의 신진 예술가상 ‘그륀슈나벨(Grünschnabel)’ 후보에 올랐다.
아이들의 순수한 직관에서 출발해 어른들의 삶에 질문을 던지기까지. 이수비 배우가 작품에 담아낸 고민과 그 여정의 의미를 들어보았다.
Q. 흔히 인형극이나 어린이극이라고 하면 특정 연령대만을 위한 장르로 지레짐작하곤 하는데요. 하지만 실제 배우님의 무대에서는 아이부터 성인까지 전 세대가 함께 웃고 몰입하곤 합니다. 이처럼 연령의 경계를 허무는 물체극만의 깊이와 매력은 무엇인가요?
"저에게 어린이 관객은 단순히 귀여운 꼬마 손님이 아니라 '관객계의 최종 보스' 같은 존재예요. 어른 관객은 예의상 웃어주기도 하고 사회적 체면을 차리지만, 아이들은 거짓말을 하지 않거든요. 그들의 반응은 지극히 직관적이고 순수하며, 그 직관에서 나오는 통찰은 놀라울 정도로 날카로워요. 그렇기 때문에 어린이를 만족시킬 수 있다면 세상의 어떤 관객도 만족시킬 수 있다는 확신이 있죠.
제가 어린이극 형태를 계속해서 무대로 끌어오는 이유도 바로 그들이 지닌 '가공되지 않은 무구(無垢)함' 때문이에요. 여기서 무구함이란 결코 유치하거나 깊이가 얕다는 뜻이 아니에요. 거추장스러운 지적 포장이나 복잡한 사연, 겹겹이 둘러싼 계산을 싹 덜어낸 '가장 순수하고 직관적인 연극적 틀'을 의미하죠. 아이들의 사유 방식은 이것저것 돌려 생각하지 않고 단번에 본질을 꿰뚫어 버려요. 그 한 큐에 깨어나는 직관적 통찰이야말로 연극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높은 경지라고 생각해요."
Q. 졸업작품이자 데뷔작인 〈Alles Gute – K(l)eine Antworten auf eine große Frage〉는 어떤 고민에서 출발한 작품인가요?
"한 마디로 정리하면 '다 큰 어린이들을 위한 오브제극(Object theatre for grown-up children)'이라고 할 수 있어요.
배우라는 꿈을 이루고 나서 '다음 꿈은 뭘까?' 생각해 보니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이더라고요. 막연히 '마흔 살 전까지는 꼭 좋은 사람이 되어야지' 하고 마음먹고 살았는데, 어느 날 문득 제 나이를 돌아보니 이미 서른여덟이 되어 있더라고요! 겨우 2년밖에 안 남았다는 걸 깨달은 순간, '나 빨리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하는데... 그런데 대체 좋은 사람이란 무엇이지?'라는 조바심과 고민에서 이 작품이 출발했어요.
테이블 무대 위에는 종이와 곰돌이 젤리, 행주 같은 지극히 일상적인 사물들이 등장해요. 구겨지고 찢어지며 모습을 바꾸는 종이, 시위를 벌이는 젤리곰들, 청소를 마친 뒤 더럽고 축축해진 행주까지. 이들의 움직임을 따라가다 보면 ‘과연 무엇이 바르고 좋은 삶인가?’라는 질문과 마주하게 되죠. 겉보기에는 사물들이 틱틱대며 장난치는 아이들의 놀이 같지만, 그 직관적인 행동 속에 담긴 진지한 질문은 방심하고 있던 어른 관객들의 가슴을 턱 막히게 하는 울림으로 다가와요.
어릴 적 극장에서 목격한 단 한 장면의 경이로움이 한 사람의 평생을 관통하는 이정표가 되기도 하잖아요. 어린이에게는 세상에 대한 경이로운 첫 만남을, 어른에게는 일상을 환기하는 직관적 순수함을 선물하는 것이 제가 물체극을 포기할 수 없는 이유이자 소명이에요."
Q. 이 작품으로 독일 에를랑엔 국제 물체극 페스티벌에 초청돼 8회 공연을 올리고, 스위스 Figura 페스티벌의 ‘그린슈나벨’ 후보에도 오르셨어요. 이러한 성과는 배우님께 어떤 의미로 남았나요?
"사실 유학 생활 후반부에는 언어와 문화적 장벽, 그리고 이방인으로서 겪는 외로움 때문에 심신이 많이 지쳐 있었어요. 현지 문화계 시스템이나 축제 정보도 잘 몰랐고, 저를 알려줄 웹사이트는커녕 인맥도 없었죠. 그래서 졸업작품만큼은 어떠한 계산이나 타협도 없이 '내가 진짜 고집하고 싶었던 물체극의 본질'만은 원 없이 쏟아붓고 끝내자는 마음뿐이었어요. 그런데 감사하게도 독일을 대표하는 국제 물체극 페스티벌 중 하나인 에를랑엔 페스티벌의 예술감독님이 제 졸업작품을 보러 오셨고, 그 자리에서 바로 초청 제안을 주셨어요. 그렇게 8회 공연을 성황리에 마쳤고, 현지 신문 두 곳과 바이에른 방송(BR)에서도 작품을 소개해 주셔서 깜짝 놀랐어요.‘언어나 배경이 달라도, 오직 사물과 신체의 호흡만으로 현지 관객들과 깊이 통할 수 있구나’ 하는 안도감과 희열을 느꼈죠. 그곳에서 인연이 닿아 스위스 Figura 물체극 페스티벌의 '그린슈나벨' 상 후보에까지 이름을 올렸을 때는 그동안의 고단함이 한순간에 녹아내리는 기분이었어요. 스스로에겐 동양인 여성 퍼포머로서 홀로 외롭게 버텨온 유학 생활에 가장 아름다운 마침표를 찍어준 사건이었어요. 무엇보다 '내가 고민하고 믿어온 이 길이 틀리지 않았다, 앞으로도 나만의 속도로 계속 걸어가도 된다'는 커다란 확신과 평생 무대에 설 수 있는 강력한 동력을 얻었습니다."
경계 위의 아티스트
음악에는 악기가, 미술에는 작품이라는 매개가 있지만, 연극에서는 배우 자신의 몸과 삶 자체가 무대 위의 언어가 된다. 아시아인이 한 명도 없던 학교에서 이방인으로 살아가며 마주한 문화적 차이와 타인의 시선은 이수비 배우에게 무대 위에서 풀어내야 할 이야기가 되었다. 자신이 정의하는 나와 타인이 바라보는 나 사이의 간극을 솔로 마스크극 〈MICRO-Alien〉에 담아냈다면, 이제는 그 낯설고 불편했던 경험을 문화적 오해마저 유쾌한 웃음으로 바꾸는 신작 〈웃음과 인후통의 관계: 오해에 바치는 송가(Halsweh und Heiterkeit: eine Ode an das Missverständnis)〉로 확장하고 있다. 이방인으로서의 경험을 자신만의 신체 언어와 희극성으로 빚어온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Q. 학교에서 유일한 아시아인으로 연기를 배우며 겪었던 문화적 차이와, 이를 담아낸 솔로 마스크극 <MICRO-Alien>에 대해 이야기해 주세요.
"음대나 미대에는 한국 유학생이 많지만, 독일 물체극 전공에서는 제가 유일한 아시아인이었어요. 음악은 악기, 미술은 작품이라는 객관적인 매개가 있지만, 연극은 배우 자신의 몸과 감정, 삶의 궤적 자체가 무대 위에 그대로 올라가는 장르잖아요. 동료들과 문화적 맥락이나 가치관이 달라 작품을 토론할 때 갈등도 겪고 치열하게 부딪혀야 했죠.
내가 정의하는 나와 남들이 바라보는 나 사이의 차이, 그 타국의 시선 속에서 느꼈던 자아의 균열을 다룬 작품이 2023년 FITZ 극장에서 발표한 솔로 마스크극 〈MICRO-Alien〉이었어요. 마스크 뒤로 얼굴을 가리고 신체의 유희와 움직임만으로 '경계인'으로서의 외로움과 정체성을 질문했던 작업이었죠. 돌아보면 그 낯설고 고독했던 시간이야말로 무대 위에서 저만의 독창적인 신체 언어와 깊이 있는 시선을 완성해 준 소중한 자산이 되었습니다."
Q. 오는 12월 초연을 앞둔 신작 <Halsweh und Heiterkeit>에서는 문화적 오해와 차이를 희극적으로 풀어내신다고요. 어떤 계기로 이 작품을 구상하게 되셨고, 관객들은 어떤 이야기를 만나게 될까요?
"동료 배우 요 포제넨스케(Jo Posenenske)와 공동 제작 중인 어른 관객을 대상으로 한 광대·물체극이에요. 살짝만 스포해드리면, 오래전부터 무대 위에서 꼭 써보고 싶었던 오브제인 '노래방 기계'가 들어가고 '줄(끈)'도 재료가 될 것 같아요.
작품의 핵심 주제는 '오해(Missverständnis)'와 소통이에요. 외국인으로 독일에 살면서 발음이 미묘하게 비슷해서 오해를 샀거나 곤혹스러웠던 독어 단어들을 제가 개인적으로 리스트로 모아두었거든요. 그 단어 리스트를 함께 작업하는 동료에게 보여줬더니 너무 흥미로워하고 유쾌해하면서 ‘이걸로 씬을 만들어보자’고 하더라고요. 그렇게 외국인으로서 겪은 오해와 차이들이 무대의 훌륭한 재료가 되었어요.
외국인 입장에서 오해를 알아차리고, 눈치 보며 일일이 설명해야 했던 순간들이 당시에는 서럽거나 좌절로 다가오기도 했지만, 알고 보면 참 어처구니없고 유쾌하며 함께 웃어넘길 수 있는 '오해의 미학’이 존재해요. 어쩌면 깊은 아픔과 고뇌를 안고 있는 ‘오해’를 희극이라는 그릇에 담아 유쾌하게 보여드릴 예정입니다.”
Q. 마지막으로, 물체극을 꿈꾸는 한국의 후배 예술가들과 이 장르가 아직 낯선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신가요?
"유럽이나 독일에서 이 컨템포러리 물체극을 공부하고 싶다면 '무조건 도전하라!'고 강력하게 말씀드리고 싶어요. 나 자신이 추구하고 싶은 예술적 충동과 순수한 아이디어를 어떠한 제한도 없이 마음껏 펼칠 수 있는, 삶에 주는 예술적 쾌감이 정말 확실한 장르거든요.
한국에는 아직 물체극 저변이 넓지 않다 보니 늘 동료에 대한 목마름과 갈증이 커요. 한국에서 이 장르를 시도하거나 공부하려는 후배, 동료가 있다면 언제든 입시 상담부터 작업 공유까지 기쁜 마음으로 돕고 응원하고 싶습니다. 입시 상담부터 유학 비법까지 다 알려드리고 싶어요. 조금은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사물이 살아 숨 쉬고 각자의 경험으로 관계를 맺어가는 이 유쾌한 무대 위로 마음을 열고 편안하게 놀러 오셨으면 좋겠습니다."
비워둔 자리에 피어나는 상상력
이수비 배우가 사물과 나누는 대화는 결코 일방적이지 않으며, 과장된 서사로 관객을 압도하려 들지도 않는다. 그저 사물에게 가만히 손을 내밀고, 배우와 사물 사이에 여백을 만든다. 그곳에는 관객 저마다의 상상과 추억, 그리고 터져 나오는 웃음이 다정하게 들어앉는다.
찌릿하고 시큼한 신맛으로 다가오는 삶의 뜻밖의 순간들 속에서도 물체극이 건네는 유희는 우리 안에 굳어 있던 껍질을 깨뜨린다. 사물의 물성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가식이나 흉내 없이 자기 자신으로 무대에 서는 일. 그리고 배우와 사물 사이에 생겨난 다정한 여백으로 관객을 초대하는 일. 이수비는 그렇게 무대 위에서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는 기쁨을 나누며, 사물과 사람 사이에 새로운 소통의 가능성을 열어간다. 서울과 유럽을 오가며 사물들과 이어갈 그의 다음 대화가 벌써부터 기다려지는 이유다.
언젠가 일상의 복잡한 언어와 핑계에 지쳐 마음이 굳어버린 날, 가만히 그의 무대로 걸음을 옮겨보자. 찻잔과 노란 레몬, 젤리들이 건네는 엉뚱하고 순진한 인사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어느새 잊고 있던 순수한 웃음과 마주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니 인생이 신맛이더라도, 유쾌하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