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인극이지만 1인극이 아닌 공연.
캐스팅 보드에 35명의 이름이 올라가도 전혀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을 무대.
두산아트센터가 '두산인문극장 2026: 신분류학(New Taxonomy)'의 마지막 프로그램으로 올린 나는 나의 아내다(I Am My Own Wife) 는, 한 명의 배우가 120분 동안 쉬지 않고 서른다섯 명을 연기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화제가 될 만한 작품이다.
그러나 이 공연이 던지는 질문은 "힘들겠다"거나 "대단하다"는 감탄 이상의 자리에 있다.
누군가 연극 연기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이 작품을 슬며시 들이밀고 싶다.
한 사람 안의 서른다섯 개 존재
미국 극작가 더그 라이트(Doug Wright) 의 대표작인 나는 나의 아내다는 동베를린 출신의 실존 인물 샤로테 폰 말스도르프의 삶을 바탕으로 한다.
히틀러의 나치 시대와 동독 사회주의 체제를 모두 통과해 살아남은 여장남자 샤로테는 1890년대의 축음기와 시계, 가구를 수집하고, 성소수자들의 휴식처였던 카바레 '뮬락리쩨'를 정리해 자신의 집에 '그륀더짜이트'라는 박물관을 만든 인물이다.
작가 더그는 그(그녀)의 인생을 연극으로 옮기기 위해 인터뷰를 시작하지만, 나치와 사회주의 체제의 생존자라는 단순한 설명을 넘어서는 샤로테의 모호하고 놀라운 삶에 매혹되는 동시에 혼란을 느낀다.
이 작품은 2004년 미국에서 퓰리처상 드라마 부문, 토니어워드 Best Play, 드라마데스크어워드 Best Play를 휩쓸며 평단의 인정을 받았다.
더그 라이트는 이후에도 Quills, Posterity, Good Night, Oscar 등의 연극과 뮤지컬 Grey Gardens, War Paint 등을 통해 꾸준히 입지를 다져온 작가다.
국내에는 2013년 '두산인문극장 2013: 빅 히스토리' 프로그램으로 초연되어 한국연극평론가협회 '올해의 연극 베스트3'에 선정되었고, 당시 샤로테 역을 맡은 배우 지현준은 동아연극상 유인촌신인연기상과 대한민국연극대상 신인연기상을 수상했다.
12년이 지난 2026년, 지현준이 같은 역으로 돌아오고 배우 백석광이 더블 캐스팅으로 합류하며, 초연 연출을 맡았던 강량원과 번역·드라마터그 김기란도 다시 한 자리에 모였다.
"연기"는 기본적으로 타인이 되는 일이다.
하지만 하나의 공연 안에서 여러 명이 된다는 것은 일반적인 연기와는 다른 층위의 일이다. 상당한 집중력과 몰입이 요구된다.
1인다역을 하는 공연을 여러 번 봐왔지만, 솔직히 말해 1인다역은 몰입이 쉬운 형태가 아니다. 얼굴도 같고 옷도 같고 목소리도(변조를 거치더라도) 기본적으로 같은 사람이 여러 인물을 오가다 보면, 흐름을 잠깐만 놓쳐도 관객은 충분히 헷갈릴 수 있고, 자칫 극 전체가 산만해질 위험도 있다.
하지만 지현준 배우가 연기하는 더그, 샤로테, 존, 슈타지, 알베르트는 모두 완전히 다른 '인물'이었다.
고정되지 않는 몸, 아카이브가 되는 무대
2013년 초연 당시부터 작품에 함께해온 김기란(번역, 드라마터그)의 말을 빌리면*, 그는 초연을 통해 무대 위의 몸은 "인물을 담기 위한 고정된 형상이 아닌, 규정할 수 없는 물질"로 이해되어야 하며, 그 몸은 "근대적 질서와 역사에서 배제되거나 비루한 것으로 삭제되었던 존재들을 놓치지 않고 아카이빙한 인간종의 총합"을 지향한다는 것을 발견해냈다고 했다. (*<나는 나의 아내다> 2026 프로그램북)
적절한 감정 조절과 흐름의 끊고 맺음은 인물을 입체적으로 드러내면서도 관객이 거기에 너무 휩쓸리지 않게, 일종의 전지적 시점을 유지하게 만들어준다. 연출은 관객에게 특정 역할을 부여하지 않는다. 대신 관객을 관찰자로, 때로는 샤로테로, 더그로, 심지어 가구나 벽돌로도 온전히 존재하게 둔다는 느낌을 준다. 이 자유로운 관찰의 시선이 나는 나의 아내다의 이야기와 발자취, 음악소리를 따라가게 만들고, 그 흐름은 처음부터 끝까지 흔들리지 않고 유지된다.
그리고 그 모든 다른 인물을 한 사람이 연기했기 때문에, 작품의 주제는 오히려 더 선명하게 부각된다.
과거와 현재, 남성과 여성, 독일과 미국, 친구와 연인, 정부와 시민, 전쟁과 평화, 물질과 감정, 고통과 기쁨, 인간과 비인간—그 모든 경계가 한 몸 안에서 허물어진다.
빛과 그림자로 짜인 또 한 명의 배우
무대는 매우 작다. 하지만 그 작은 공간은 35역의 다양함처럼 순식간에 여러 공간으로 변모한다. 소품이나 장치를 많이 쓰지 않는 단순한 무대 구성이 오히려 연기를 깔끔하게 돋보이게 했고, 불필요한 소품이 없다는 점이 이점으로 작용했다.
무대디자인을 맡은 장호의 무대는 말 그대로 샤로테의 보석함처럼 기능한다. 그 안에서 이야기가 펼쳐진다는 사실 자체가, 샤로테라는 인물의 삶과 기억에 초대받았다는 몰입감을 충분히 만들어낸다.
또 하나 주목할 부분은 조명이다. 최보윤이 디자인한 조명은 여러 사람을 연기하는 한 명의 배우 안에 담긴 수많은 정체성을 표현하는 데 있어 빛과 그림자로 결을 같이한다. 투영되고 또 투영되지 않는 빛은 때로는 그 복합성을 담아내고, 때로는 인물과 사물에 깃든 기억을 뿜어내는 매개로 느껴진다. 배우의 몸짓이나 대사가 직접 표현하지 않는 더 많은 이야기를, 조명이 또 한 명의 배우가 되어 대신 말한다. 기억과 시간의 질감이 되어 그녀를 천천히 따라가는 식이다.
소품과 의상의 변화 없이도 공간과 인물이 순식간에 바뀌는 것을 온전히 느껴보는 것이 이 작품의 관객이 해야할 의무라면 의무다.
중간중간 복잡하게 끼어드는 독일어, 영어, 생소한 지명, 연·월·일 표기를 빠른 속도로 내뱉는 한 명의 순수 한국인 배우를 지켜보는 경험 역시 그렇다.
나는, 나의 누구인가
작품의 제목 "나는 나의 와이프다"라는 문장은 '나'를 정의하는 말이 아니다. "결혼하지 않을 테야"라는 거부가 아니라, 또 하나의 다른 존재를 스스로에게 추가하는 선언이다. 그 존재는 누구든 될 수 있고, 누구든 상관없다.
올해 두산인문극장의 주제인 '신분류학'이 묻는 질문—"당신은 어떤 기준으로 세상을 나누는가"—은 샤로테라는 인물 앞에서 무력해진다. 어떤 분류 기준으로도 정의되지 않는, 역사와 관계와 권력에 따라 다르게 해석되는 존재의 경계적 모호성이 이 작품의 본질이다.
나는, 나의 누구인가? 너는, 너의 누구인가? 나는 나의 아내다는 그 질문을 객석에 가만히 남겨두고 끝난다.
두산인문극장 2026: 신분류학
두산인문극장은 두산아트센터가 2013년부터 매년 하나의 주제로 공연·전시·강연을 이어온 인문학 프로그램이다. 올해 주제 '신분류학(New Taxonomy)'은 "당신은 어떤 기준으로 세상을 나누는가"라는 질문에서 출발한다. 어떤 분류도 완전할 수 없고 기준 또한 임의적이지만, 그렇다고 분류 자체를 멈출 수는 없다는 전제 아래, 기존의 경계와 체계를 다시 들여다보고 새로 그어보려는 시도가 올해 프로그램의 골자다.
이 주제는 '두산인문극장 2026'의 마지막 공연으로 나는 나의 아내다를 선택한 이유와도 직접 맞닿아 있다. 어떤 분류 기준으로도 온전히 설명되지 않는 샤로테라는 존재—남성도 여성도, 가해의 시대의 생존자도 단순한 피해자도 아닌 인물—는 '신분류학'이 묻고자 하는 경계의 모호성을 가장 첨예하게 구현하는 사례이기 때문이다.
나는 나의 아내다는 7월 12일까지 두산아트센터 Space111에서 공연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