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를 앞둔 롤란트는 30년 간의 교수 생활이 담긴 논문집을 헌정 받고, 정작 자신의 인생을 바꾼 기억은 그 어디에도 없음을 깨닫는다. 40년 전, 베를린을 떠나 작은 대학에서 만난 영문학 교수 Y 얘기를 제자에게 털어놓기 시작한다. 셰익스피어, 그리고 엘리자베스 시대의 문학을 향한 그의 열정은 젊은 롤란트를 단번에 사로잡았다. 두 사람은 학문으로 가까워졌지만, 그 뜨거움이 어디서 비롯된 것인지 롤란트는 끝내 알 수 없었다. 환대와 거절을 오가는 Y의 태도만큼이나, 자신의 감정에도 이름을 붙일 수가 없다.
Unbenannt는 '이름 없는', '무명의', '제목 없는'이란 뜻을 가진 독일어이다. 슈테판 츠바이크가 소설 속에서 형용사로 쌓아올렸던 섬세한 감정의 층위들을 황정은 작가는 무대 위의 동사로 변환한다.
황정은 작가는 직접 작품을 쓰기도 하고, <운베난트>에서처럼 각색 작업에도 참여한다. 예술의전당 연극 '햄릿' , 국립극단 연극 '헤다 가블러' 등 여러 장르를 넘나드는 작업을 이어오고 있다.
연극 <운베난트> 관람 포인트 / Why you should see it
1. 말해지지 않은 것들로 채워지는 무대
느껴지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행해지는 것으로 보여준다. 시학과 언어학에 대한 감각이 있는 관객이라면 이 변환의 결이 얼마나 섬세한지 단번에 감지할 것이다. 말해지지 않은 것들이 무대를 채우고, 동작 하나하나가 언어의 열 배 이상의 무게를 지닌다. 이 작품에서 감정은 대사보다 먼저 움직인다.
이 작품의 근원에는 두 종류의 혼란이 존재한다. 하나는 감정을 언어화하지 못해 생기는 혼란이고, 다른 하나는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발화하지 못해 생기는 혼란이다. 겉으로는 비슷해 보이지만, 두 혼란은 전혀 다른 고통에 속한다. 전자가 인식의 문제라면, 후자는 관계의 문제다. <운베난트>는 이 둘을 섞어버리지 않는다. 두 인물을 통해 서로 다른 결의 감정을 끝까지 분리한다.
우리는 결국 이름 붙이기 어려운 감정 앞에서 나열이라는 방식에 기대게 된다. 호기심인지 애정인지, 젊음과 열정에 매혹된 것인지, 혹은 한 사람 자체를 사랑하게 된 것인지. 규정할 수 없는 마음은 점점 길어진 문장 속으로 숨어든다. 감정을 규정할 수 없으니, 말은 길어지고, 그 말들의 나열은 어느 순간 또 다른 언어가 된다. <운베난트>는 그 나열을 무대 위에 올린다.
2. 강연을 가장한 연극
<운베난트>가 흥미로운 또 하나의 이유는, Y의 강연 장면에 있다. 그는 강연을 하고 있으나, 동시에 연극하고 있다.
엘리자베스 시대의 연극은 이렇게 시작한다.
엘리자베스 시대의 연극은 셰익스피어로 대표된다. 영국 연극의 황금기인 이 시기는 전용 극장인 글로브 극장에서 신분과 상관 없이 대중적인 인기를 누렸으며, 화려한 무대 장치보다는 시적이고 역동적인 대사를 통해 인간의 욕망과 비극을 입체적으로 그려냈다.
시골의 오락, 여가, 축제, 거리의 시인들, 익살, 음악, 그리고 사랑과 역동. 그렇게 시작된 활기는 Y의 강연장, 그리고 Y의 집으로 옮겨간다. 작품은 모든 것이 뒤섞이던 시대의 역동성을 가장 간결한 단어들로 다시 배치한다. 인물들은 폭풍우를 지나고, 거리의 시인이 되며, 서로의 언어 안으로 침범한다. Y의 강연 안에는 희곡적 언어와 감정의 스펙터클이 동시에 존재한다. Y의 수업은 학문처럼 시작되지만, 끝내 고백으로 흘러간다.
3. 젠더리스 캐스팅
이 극은 교수 Y와 그의 제자, 단 두 인물로 이루어진 2인극이다. 제자는 여자 캐스트일 때 '로테'가 되고 남자 캐스트일 때 '롤란트'가 된다. 그리고, 교수의 이름은 끝에 Y로 남는다. 이 Y라는 이름은 이 극에서 가장 긴장감 있는 기표다. 롤란트의 시선으로 지난날을 되짚는 이 서사는, 회상극의 형식을 띠면서도 동시에 현재형의 고백처럼 작동한다. 기억은 과거를 향하지만, 감정은 여전히 현재에 머문다.
김보정 배우의 Y, 이정화 배우의 로테를 관람했다. 관객과 대화가 있는 날 공연장에 방문한 덕에, 어느 다회차 관람객의 질문을 통해 남자 캐스트와 여자 캐스트의 캐릭터 해석 차이를 엿들을 수 있었다. 젠더리스 캐스팅의 묘미는 여기에 있다. Y와 롤란트의 관계는 인물의 성별에 따라 전혀 다른 결로 읽힌다.
이정화 배우의 로테는 치기 어리고 발랄한 대학생이다. 앞선 자에 대한 동경과 선망이 자연스럽게 배어 있었다. 한 관객이 Y와의 첫 만남 장면에서 어떤 감정으로 연기했는지 묻자, 이정화 배우는 단어들을 차례로 나열했다. 반가움, 호기심, 신선삼, 희망, 가능성. 정의하기보다 나열함으로써 가까워질 수 있는 감정들. 그것이 로테가 Y를 처음 마주한 순간의 감정이었을 것이다.
반면 김보정 배우의 Y는 에너지가 넘치면서도 쓸쓸한 인물이었다. 어쩌면 고독에 이미 익숙해진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다. Y는 말이 많은 인물이다. 강의실에서, 집에서, 끊임없이 말한다. 그러나 김보정 배우의 Y는 그 많은 말들 사이에서 정작 하고 싶은 말을 끝내 꺼내지 못하는 사람이다. 언어를 가장 잘 다루는 사람이 언어로 닿을 수 없는 감정 앞에서 무너진다. 이 아이러니가 Y를 더욱 애잔하게 만들었다. 오랜 시간 감정을 우회한 탓에 결국 고백이라는 형태로 터져나올 때, 그것은 이미 고백이라기보다 분출에 가까웠다. 이번 작품은 원작에 있던 남편 역할이 축소되어 2인극으로 개작되었다. 그 선택이 Y의 고독을 한층 더 짙게 만든 것은 아닐까 싶었다.
정작 중요한 것은 늘 완전한 문장으로 남지 못한다. 감정은 기록 바깥에서 흔들리고, 관계는 명명되지 않은 채 잔류한다. <운베난트>는 그 남겨진 감각의 자리에서 머문다.
연극 <운베난트>는 예스24스테이지 3관에서 2026년 6월 7일까지 공연한다.
Producer Seungwon Han (한승원), Jongseok Kim (김종석) Adaptor Jungeun Hwang (황정은) Director Eunnim Kim (김은) Composer Hansik Gong (공한식) Technical Director Yushin Kim (김유신) Set Designer Jiin Song (송지인) Props Designer Juyeon Noh (노주연) Sound Designer Juhan Kim (김주한) Sound Effects Jihwi Kwon (권지휘) Lighting Designer Hyunkyu Lee (이현규) Costume Designer Moonki Hong (홍문기) Makeup Designer Sookhee Kim (김숙희) Production Manager Subin Kim (김수빈) Stage Manager Eunjin Jo (조은진) Cast Woojin Hong (홍우진), Bada Kim (김바다), Kangwoo Lee (이강우), Jaewoong Choi (최재웅), Bojung Kim (김보정), Junghwa Lee (이정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