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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케이스 리뷰 <이모션코드> : 감정이라는 이름의 인간성

Hailey Kim

Hailey Kim

2026. 05. 04 16:58Views 193

미완을 함께 완성하는 정직한 관객들의 자리에서

After the show (photo: HereWeAre)
After the show (photo: HereWeAre)


합의된 관객들로 채워진 객석. 모두가 이것이 미완임을 알면서도, 기꺼이 완성을 상상하는 자리. 이곳은 가장 정직한 관객들로 채워진 〈이모션 코드〉 쇼케이스 현장이다. 그리고 나는 쇼케이스가 끝난 후, 한 가지 질문을 품게 되었다. 감정을 제어할 수 있다면, 나는 무엇을 하고 싶은가.



소박한 무대 위 선명한 에어리어


무대는 정말 작은 공간이었다. 투박한 의자와 테이블, 그리고 대본이 전부였다. 세트는 물론, 의상도 없이 모두가 단체복 차림이었다. 무대와 객석 간의 거리는 불편할 만큼 가까웠다. 그럼에도,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무대 장치나 소품, 의상으로 완성된 무대가 더 선명하게 그려졌다. 쇼케이스이기에 나의 상상력은 오히려 더 넓은 곳으로 확장되었다.


Stage (photo: HereWeAre)
Stage (photo: HereWeAre)


첫 넘버가 퍼지는 순간, 몰입은 이미 시작되었다. 소박한 지하 공연장에서 출발해 나는 어느새 에어리어에 도착해 있었다. A구역에서 D구역으로 이동하는 장면에서 흘러나오는 요란한 넘버는 온몸을 찌릿하게 했고, 열차를 탄 사람들, D구역의 풍경, 고독한 조명, 아우성, 그리고 세찬 비가 눈앞에 펼쳐졌다. 낮게 읊조리던 정아의 목소리는 공연이 끝난 후에도 귀에 맴돌았다.


분명 처음 듣는 넘버임에도, 낯설지 많은 않은 익숙한 코드에 친숙함을 느꼈다. 혹자는 식상할지 몰라도, 그러한 감각을 불러일으키는 것 자체가 이 작품이 지닌 힘이다. 창작 초연 뮤지컬이 관객에게 ‘자연스러운  감동'을 준다는 것은, 작품의 보편성이 그만큼 견고함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감정과 효율의 등가교환


Rehearsal Photo Board (photo: HereWeAre)
Rehearsal Photo Board (photo: HereWeAre)


〈이모션 코드〉가 그리는 세계는 감정제어칩 하나로 감정을 억제할 수 있는 근미래다. 극강의 효율이 답이 된 시대. AI가  뉴스 편집권을 쥐는 이 세계에서는 공포를 조성하는 어떠한 기사도 허용되지 않는다. 감정제어칩을 이식 받아 동요 없이 평안한 이 곳,  A구역은 유토피아를 가장한 디스토피아다. 효율성만이 전부인 자본주의 논리가 마침내 인간의 내면에까지 손을 뻗쳤다. 어쩌다 승리의 상징이었던 인간은 스스로를 파괴할 위험에 자진해서 처하게 되었을까.


이 작품은 근미래를 배경으로 삼고 있지만, 무엇보다 지금 이 시대를 정밀하게 진단한다. 기술이 편리함과 효율을 넘어 감정과 기억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탐구하며, 감정의 가치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이미 알고리즘이 주도하는 감정의 자극 속에서 살고 있다. 분노가 클릭을 유발하고, 슬픔이 공유를 유도하, 기쁨은 '좋아요'로 환산된다. 〈이모션 코드〉가 말하는 디스토피아는 생각보다 가까이 있다.


"인본주의적 가치를 잃어버린 인간은 기술적 가치와 물질적 가치에만 집중해서 깊은 정서적 경험을 하고, 거기에 따라오는 기쁨과 슬픔을 느낄 능력을 상실해버렸다."

— 에리히 프롬, 『희망의 혁명』

이 문장은 수십 년 전에 쓰였지만, 〈이모션 코드〉의 세계관을 가장 정확하게 설명한다. 〈이모션 코드〉는 기뻐할 능력, 그리고 슬퍼할 능력을 스스로 포기한 세계를 무대에 올린다. 잊어선 안 될 것들, 무뎌져선 안 될 기억들을 칩 하나에 맡긴 사회. 제대로 기능하는 사회를 갖기 위해서도, 인간다운 삶을 위해서도 감정과 기억은 필수적이다. 우리는 인간으로 남기 위해서라도 감정에 대한 주권을 지켜야 한다. 분개하고, 비통하고, 그리워하고, 자애로울 수 있어야 한다.



제4의 벽을 넘어


'연기를 잘 하는 사람'을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관객이 무의식 중에 몰입하게 만든다면, 적어도 관객에게 도달하는 어떤 힘이 있다는 뜻이 아닐까. 세트와 의상이 없는 상황에 오직 기대할 수 있는 것은 배우와 극본뿐이다. 이때 배우와의 거리가 너무나 가까워 서로 부담을 느낄 수도 있다. 내가 그러했다. 배우에게 응원을 담아 보내고 싶은 마음에 초반부에 의식적으로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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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내가 표정을 찡그리고 있다는 것조차 자각하지 못할 정도로 무대에 집중하고 있었다. 공연이 좋지 않아서 찡그린 것이 아니다. 이야기에 끌려 들어간 것이었다. 쇼케이스라는 환경이 만들어내는 날 것의 에너지, 그 안에서 배우들이 발산하는 집중력이 결합하여 만들어진 몰입이었다. 완성된 무대가 올라올 날, 이 작품이 얼마나 더 강력해질지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땀방울로 일궈낸 공연, 극장전


〈이모션 코드〉는 극단여행자의 인큐베이팅 프로그램 '극장전(劇場田)'의 일환으로 제작되었다. 극장전은 밭 전(田)자를 쓴다. 이 극장에서 다양한 연출가와 작가의 작품을 일군다는 뜻이다. 공연팀은 여행자극장에서 공연하고, 극단여행자가 소정의 제작비를 지원하며, 티켓 수익은 공연단체와 나눈다. 창작자에게 가장 필요한 공간, 시간, 그리고 첫 번째 관객을 동시에 제공한다.


농사는 혼자 하는 일이 아니다. 한 계절 내내 보살펴야 마침내 수확이 생긴다. 공연에 관해 이보다 더 적절한 비유를 찾기 어렵다. 한 편의 공연이 완성되기까지, 그것은 연출가 한 사람의 것도 아니고, 작가 한 사람의 것도 아니다. 수많은 손길과 눈길로 비로소 형태를 갖추게 된다. 극장전은 그 과정을 가능하게 하는 토양이다.


Curtain call (photo: HereWeAre)
Curtain call (photo: HereWeAre)


진정한 감정이란


〈이모션 코드〉는 감정을 제어하는 세계를 가장 감정적인 방식으로 무대에 올린다. 빠르게 발전하는 사회 속에서 잊혀지는 감정과 기억에 대해 탐구하며, 기술에 묻혀 잊혀져 가는 인간 본연의 감정을 되돌아보게 한다. 그들이 관객에게 던지는 질문은 결국 이것이다. 진정한 감정이란 무엇인가.


오랜만에 좋은 창작 뮤지컬을 만나 반가운 마음으로 극장을 나섰다. 이 작품이 완전한 무대 위에 다시 설 날이 오기를 기다려진다. 그리고 그날, 처음 이 질문을 받은 관객으로서 다시 그 자리에 앉고 싶다. 상상력을 지탱해줄 창작 지원 사업이 더 많아지기를, 그리고 이처럼 정직한 질문을 던지는 창작자들이 더 오래 무대에 설 수 있기를 바란다.


Director Seul Lee (이슬) Playwright Hyunkyoung Yoon (윤현경) Composers Sunhye Yoon (윤선혜) · Jaeheon Yoo (유재헌) Assistant Director Sumin Lee (이수민) Dramaturg Yurim Son (손유림) Choreography Director Hyeju Han (한혜주) Music Consultant Hanju Lee (이한주) Cast Gaeun Kim (김가은) · Hanju Lee (이한주) · Hyungyu Lee (이현규) · Hyerim Yoo (유혜림) · Jihye Lee (이지혜) · Hyeju Han (한혜주) Production Yohangza Theater (극단여행자)


Hailey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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