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Insights : 히어위아와 함께 들여다보는 창작의 세계. 공연예술계를 만들어가는 관계자들의 전략적 통찰과 진솔한 성찰을 전합니다.
신화의 기원부터 문명의 흥망성쇠를 집요하게 파고들어 온 롤란트 쉼멜페니히의 대서사시, 국립극단 안트로폴리스 5부작. 도시 테베의 건국과 광기 어린 신의 침입, 그리고 참혹한 맹목의 굴레를 지나 마침내 도달한 제4편 이오카스테는 국가라는 거대한 괴물이 자멸하는 가장 파괴적인 정점을 그린다. 전편에서 목을 매달았던 이오카스테를 다시 무대 위로 소환해 살아남게 한 이 잔혹한 재구성은, 죽음조차 허락되지 않은 자에게 또 다른 형벌을 내린다. 독일 함부르크에서는 안트로폴리스 5부작 전편을 3일에 걸쳐 연달아 선보이는 마라톤 공연 형식을 취했다. 신화의 탄생부터 문명의 몰락까지, 하나의 거대한 비극을 끊김 없이 따라가는 경험은 또 얼마나 지독했을까. 이토록 집요하게 반복되는 인간의 어리석음과 파멸을 온몸으로 견뎌내는 것,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이 연작을 가장 온전히 경험하는 방법일지도 모른다.
서지혜 연출이 윤색 과정에서 가장 매료되었다고 밝힌 지점은 침묵하던 이오카스테의 목소리가 직접적으로 무대 위에 터져 나온다는 사실이다. 극작가 롤란트 쉼멜페니히의 말처럼, 고대의 이야기는 박제된 유물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 자신의 모습을 비추는 거울이다. 소포클레스의 비극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이오카스테는 이곳에서 살아남아, 오이디푸스와의 사이에서 낳은 두 아들과 두 딸이 또 다른 비극으로 내몰리는 광경을 지켜본다. 그러나 그녀에게 주체적인 선택권은 좀처럼 주어지지 않는다. 모든 책임을 신의 섭리와 운명에 위탁한 채 파국을 바라보는 그녀의 모습은 현대의 관객에게 깊은 불편함을 안긴다. 남기애가 연기하는 이오카스테는 연약하고 여리지만, 끝내 희망을 놓지 못하는 인물이다. 에테오클레스와 폴리네이케스, 두 형제가 왕권을 둘러싸고 벌이는 전쟁 앞에서 그녀의 중재는 무력하기 짝이 없다. 권력욕에 눈먼 두 아들을 향한 모성적 호소와 평화의 언어는 이미 설득력을 잃었다. 어째서 더 적극적으로 파국을 막아서지 못하는가. 답답함에 질문을 던지고 싶어지지만, 연극은 이내 그 물음의 화살을 개인이 아닌 국가와 권력의 구조로 돌린다.
크레온이 대변하는 권력의 잔재, 메노이케우스의 희생, 안티고네와 이스메네의 불안 속에서 국가는 결국 피를 부르는 허상으로 드러난다. 흙과 모래, 공기에 지나지 않는 땅을 차지하겠다고 서로를 죽이는 인간들. 그토록 하찮은 것을 위해 자멸의 전쟁을 되풀이하는 집착은 허무를 넘어 지독한 피로감을 남긴다. 에테오클레스 역의 남동진과 폴리네이케스 역의 조영규가 그려내는 두 왕은 위엄 있는 통치자라기보다, 제 욕망 하나 다스리지 못하는 철없는 형제에 가깝다. 이들에게 국가의 존립이나 시민의 안위는 안중에도 없다. 오직 누가 왕좌를 차지할 것인가, 그 유치하고도 잔혹한 싸움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에테오클레스와 폴리네이케스의 충돌을 우리가 매일같이 목격하는 현실 정파 간의 적대적 공생으로 노골화했다면, 그들이 내세우는 대의의 위선과 ‘국가’라는 실체의 허구성은 관객에게 현실감으로 가닿았을 것이다. 숭고한 이념의 차이란 결국 권력 찬탈을 위한 알리바이에 불과하며, 그 이면의 본질은 자멸을 향해 치닫는 싸움임을 폭로하는 데 이보다 명쾌한 무대적 장치는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형제들의 날 선 대립 한가운데 불쑥 끼어드는 투어 가이드는 관객을 단숨에 현실로 끌어낸다. 극의 몰입을 의도적으로 끊어낸다. 정선미, 고용선, 서유덕, 박은호, 김윤서, 이현우, 전성환 등 코러스 배우들이 만들어내는 현대적 시선과 예언자 테이레시아스의 음산한 예언은 고대 테베의 파멸을 안내하는 동시에, 객석에 앉은 우리 자신의 시선을 되돌아보게 한다. 타국의 전쟁과 참상을 스크린 너머로 구경하듯 바라보는 오늘날의 관객 역시 이 비극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가장 당혹스러운 순간은 유치찬란한 형제들의 아집을 지켜보다 나도 모르게 실소가 터져 나왔을 때였다. 전쟁에 짓밟히는 시민들의 고통보다 서로를 향해 으르렁거리는 권력자들의 우스꽝스러운 다툼에 시선을 빼앗긴 것이다. 그들의 어리석음이 우스워 헛웃음을 짓다가도, 이내 그 웃음이 불편해진다. 누군가에게는 삶과 죽음이 걸린 전쟁이, 안전한 객석에 앉은 나에게는 한순간의 희극이 되어버렸다는 사실 때문이다. 비극을 목격하면서도 웃을 수 있는 관객이라는 위치는 묘한 자괴감과 부채감을 남긴다. 어쩌면 이 작품이 겨누는 가장 날카로운 질문은 무대 위의 어리석은 왕들이 아니라, 그들의 파멸을 구경하는 우리 자신을 향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배우들 가운데 단연 시선을 사로잡은 인물은 예언자 테이레시아스를 연기한 최무인이다. 남성의 모습으로 등장하는 테이레시아스를 연기하며 그는 묵직한 발성과 압도적인 에너지로 무대의 중심을 잡는다. 자칫 소란스럽게 흩어질 수 있는 장면에서도 그의 존재감은 극의 무게를 지탱한다. 이미 다가올 파국을 알고 있는 예언자의 목소리는, 끝내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다는 점에서 더욱 서늘하게 다가온다.
무대는 서지혜 연출의 과감한 시공간 교차를 통해 신화와 현실의 경계를 지워버린다. 미사일과 스나이퍼, 유엔과 종군기자 등 내전의 상흔을 연상시키는 요소들이 뒤섞여든다. 임일진 세트 디자이너가 구현한 허공에 매달린 도축된 소, 거대한 송전탑과 얽히고설킨 전선, 방치된 자동차와 컨테이너 박스, 무대를 자욱하게 뒤덮는 흙먼지 속에서 관객은 고대와 현대를 분간할 수 없는 시공간적 혼돈을 겪으며, 지금 이 순간에도 세계 도처에서 되풀이되는 전쟁의 참상과 인간 욕망의 민낯을 직면한다. 다만 마지막 파국으로 치달을 때의 타격감에는 아쉬움이 남는다. 이미 무수한 자극과 참상의 이미지에 노출된 현대인의 감각을 뒤흔들기에, 무대 위로 내던져지는 돌덩이만으로는 비극의 무게가 충분히 전달되지 않는다. 거듭된 죽음과 파괴 끝에 도달한 결말치고는 어딘가 건조하고 무상하다.
그러나 어쩌면 이러한 건조함이야말로 연출이 던지고자 한 질문의 본체인지도 모른다. "멈추지 못하는 문명은 과연 어디까지 나아갈 것인가." 우리는 전쟁의 끝에서 거대한 비극적 숭고함이나 교훈을 기대하지만, 현실의 전쟁은 그토록 극적이지 않다. 수많은 죽음이 쌓인다고 해서 반드시 의미가 생겨나는 것도 아니다. 승리의 영광도, 희생의 숭고함도 결국 살아남은 자들이 덧씌우는 수사에 불과하다.
전쟁의 끝에는 숭고함 따위는 없다. 그저 무의미하게 남겨진 폐허와 시체들뿐이다.
공연사진 Ⓒ국립극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