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r Liebling》이 묻는 상업화된 페미니즘의 민낯
분홍색, 화장실, 닫힌 문, 그리고 영상
공연이 시작되면 무대 위에는 여러 개의 문이 달린 감각적인 핑크빛 화장실이 관객을 맞이한다. 여성 위생용품 기업의 '친환경·여성 친화적' 이미지를 직관적으로 형상화한 이 샤방샤방한 핑크색 인테리어는, 그러나 문이 닫히는 순간 완벽한 핑크워싱(Pinkwashing)의 기만적 공간으로 변모한다. 사장과 직원이 각자의 문 뒤로 들어가 격리된 채 대사를 주고받고, 닫힌 문 위로 미디어 영상이 영사되는 오프닝은 이 오피스 파르스(Farce)가 가진 기묘한 미학을 단번에 각인시킨다.
화장실이라는 가장 사적인 공간조차 기업의 권력 투쟁과 감시의 장소가 되는 이 광경은, CEO 프랑카가 직원에게 검을 휘둘러 상해를 입히고 해고했다는 유출 동영상 소동으로 폭발한다. 문 뒤로 투영되는 영상 연출은 인물들의 비밀스러운 음모와 CCTV 감시, 틱톡 릴스 스펙터클을 무대 위로 매끄럽게 불러오며 디지털 관음증 시대의 오피스 잔혹극을 시각적으로 완성해 낸다. 닫힌 문 너머에서 들려오는 함성과 무대 전면에 영사되는 디지털 잔상은 소통이 불가능해진 신자유주의적 직장 잔혹사를 유쾌하게 증명한다.
이처럼 연극은 시작부터 '여성을 위한 진보적 혁신'이라는 깔끔한 마케팅 수사 뒤편에 도사린 찌질하고 잔혹한 권력 투쟁을 직설적인 코미디 언어로 까발린다. 생리혈과 생리컵, 땀이 뒤섞인 여성의 신체적 현실은 은폐한 채, 화장실조차 예쁜 핑크빛 포장지로 덮어버리고 '혁신 신제품'과 '시장 점유율'이라는 숫자 놀음에 몰두하는 인물들의 모습은 관객으로 하여금 폭소 뒤에 찾아오는 이상한 이질감을 경험하게 만든다.
기호와 '글리치 페미니즘'
작품명 '리블링(Liebling)'은 독일어로 '달링' 혹은 '총애받는 존재'를 뜻한다. 극 중 인물들은 누군가의 '최애(Liebling)'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투쟁하며, 기업은 시장에서 소비자에게 단 하나의 '최애 브랜드'로 선택받고자 혈안이 된다. 한편 두 경쟁 기업명 Never('결코 ~않다')와 Ever/Always('언제나')는 생리용품의 완벽성을 과장하는 마케팅 카피를 풍자함과 동시에, 눈물과 약점을 결코(Never) 보이지 않아야 하는 신자유주의 경쟁 사회의 극단적 이분법을 기호화한다.
프로그램북에 게재된 "가장 고통받는 동물이 웃음을 발명했다"라는 니체의 문언처럼, 작가 스벤야 비올라 분가르텐은 비극적 현실을 희극적 장르로 비트는 데 탁월한 감각을 지닌 극작가다. 분가르텐은 체제의 오류를 통해 시스템을 교정하는 '글리치 페미니즘(Glitch Feminism)'을 연극적으로 실현한다. 깔끔하게 포장된 '성공한 여성 CEO' 서사에 핏빛 유혈극과 중세 무기라는 글리치(오류)를 고의로 발생시킴으로써, 상업화된 페미니즘과 '허슬 문화(Hustle Culture)'가 우리의 정치적 주체성을 어떻게 박탈하는지 날카롭게 폭로한다.
정치학을 전공하고 젠더 임금 격차 해소를 위해 싸워온 연출가 티나 라닉 역시 "오늘날의 현실은 이미 풍자를 뛰어넘는다. 광기 어린 권력욕과 비극적 희극성을 무대 위에 올리는 것이 목적"이라 강조한다. 정교한 신체 연출과 탁월한 영상 매체 활용을 통해 라닉 연출은, 분가르텐의 파괴적인 글리치 텍스트를 무대 위에서 감각적인 스펙터클로 정밀하게 구현해 낸다.
'여성 기업'의 환상과 틱톡 '트래드와이프'가 시사하는 백래시
Never와 Ever는 '여성이 만들고 여성을 대표하는 기업'이라는 슬로건을 내세운다. 그러나 그 안에서 벌어지는 해고, 사찰, 스파이 침투, 그리고 폭력은 기존 남성 기득권이 주도해 온 가부장적 기업 전쟁의 수법을 그대로 답습한다. 여성이 권력의 상층부에 진입했다고 해서 시스템 자체가 진보하는 것이 아니며, 신자유주의적 성공 방식에 내몰린 여성 경영진 역시 가부장적 폭력의 능숙한 재현자가 될 수 있음을 증명한다.
CEO 베티나의 딸 레베카가 틱톡에서 '트래드와이프(Tradwife)' 인플루언서로 활동하는 설정은 현대 유럽 사회의 매우 뜨거운 백래시(Backlash) 현상을 꼬집는다. 어머니 세대가 체현한 무한 경쟁적 성취주의 노동에 내몰린 청년층 여성들이,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노동을 거부하고 가사 노동과 모성을 아늑한 콘텐츠로 감성 포장하여 소비하는 현실을 풍자하는 장치다.
이 장면에서 무대 위 영상 연출의 기지가 다시 한번 빛을 발한다. 소셜 미디어 화면 프레임이 무대 전면에 영사되며, 레베카가 수행하는 전통적 여성성 역시 또 다른 형태의 디지털 상품에 불과함을 직관적으로 보여준다. 소셜 미디어 알고리즘을 탄 보수적 가치가 '자기케어'로 재포장되는 이면에는, 정체성을 팔아 영향력과 수익을 얻는 미디어 자본주의의 역설과 극우적 가치의 은밀한 침투가 도사리고 있다.
무너진 연대와 핏빛 결말
극의 결말부에 다다르면 오피스의 신사적인 가면은 완전히 벗겨지고 무대는 난투극으로 변모한다. 여성 캐릭터들은 서로를 향해 검과 아침형 별(Morgenstern), 도끼를 휘두르며 사생결단의 혈투를 벌인다. 이 핏빛 슬랩스틱(Schlocky slaughter)의 유혈극은 개별 인물들의 도덕적 악의 때문이 아니라, 서로를 찌르고 짓밟아야만 살아남는 자본주의 독점 체제의 가혹함이 인물들을 어디까지 내몰 수 있는지를 극단적으로 시각화한다.
모든 난장판이 끝나고 피투성이가 된 채 마스크팩과 화장을 지워내는 결말부에서, 인물들은 비로소 자신들이 세대를 넘어 전달된 '여성적 고통과 상처의 네트워크'에 함께 묶여 있음을 깨닫는다. 세포 속에 저장된 고통을 자각한 그들은, 서로를 향했던 법적 고소를 취하하고 자산을 사회에 환원하거나 공존을 모색하는 선택을 시도한다.
그러나 극이 던지는 메시지는 온정주의적 자매애의 완성으로 깔끔하게 닫히지 않는다. 극장 안을 채우는 진짜 잔상은 희망찬 연대의 노래가 아니라, 방금 전까지 무대를 지배했던 칼소리와 여전히 무한 경쟁을 부추기는 외부 시스템의 압력이다. 연극은 서로를 베어 넘긴 피비린내 나는 폭력의 끝자락에서야 겨우 타인의 통증을 확인하는 이 비극적 구도를 통해, 제로섬 게임의 시장판 안에서 연대라는 구호가 얼마나 위태로운지를 반어적으로 묻는다.
포장지뿐인 페미니즘을 넘어 현실의 격투장으로
《Der Liebling》이 관통하는 가장 핵심적인 비판은 페미니즘이 기업의 수익성과 브랜드 마케팅을 위해 전유되는 '상업화된 페미니즘(Pinkwashing)'의 현주소다. 해방과 진보의 수사들이 사회적 변혁의 진정한 동력이 되기보다, 기업의 브랜드 이미지를 재고하고 상품 소비를 촉진하기 위한 '진열장의 장식용 포장지'로 전락한 현실을 연극은 거침없이 까발린다. 무대 위 핑크빛 화장실 인테리어처럼, 자본주의 시장은 '걸보스'라는 진보적 구호를 반갑게 팔아치우지만 그 내부의 구조적 착취와 무한 경쟁 메커니즘은 조금도 수정하지 않는다.
이 작품은 현대 사회의 구체적인 병리 현상들을 정밀하게 꼬집는다. 무한 성취를 강요하는 신자유주의 노동 환경, 소셜 미디어를 통해 극우적 백래시가 감성적 삶의 방식으로 포장되는 현상, 그리고 경쟁 구조(divide et impera) 안에서 개인들이 연대의 능력을 상실해 가는 현실이 그것이다. 승자독식의 자유경제시장 체제 안에서 완벽한 '여성 연대'를 기대하는 것이 구조적 불가능에 가까움에도 불구하고, 시장은 끊임없이 개인들에게 '걸보스가 되라'고 종용한다.
결국 이 연극이 핏빛 소동을 거쳐 관객과 창작자 모두에게 던지는 궁극의 질문은 커튼콜 너머의 삶을 향한다. 핑크빛 화장실 문이 닫힌 뒤, 우리는 각자의 일터와 사회라는 현실의 격투장으로 돌아가야 한다. 우리는 과연 페미니즘마저 매끄러운 상업적 상품으로 소비하며 타인을 베어 넘기는 경쟁에 안주할 것인가, 아니면 그 분홍색 포장지를 찢어발기고 불완전하더라도 시스템의 모순에 균열을 내는 실질적인 비판적 연대로 나아갈 것인가? 연극이 남긴 질문은 극장을 나서는 우리 모두에게 스스로 어떤 삶의 결단을 내릴 것인지 분명하게 묻고 있다.
공연 사진 © Isabel Machado Rios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