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 머문 자리
히어위아 씨어터 클럽 〈소크라테스 패러독스〉오프라인 밋업
이 글은 EP.1 〈일상에서 극장으로, 다시 일상으로〉에서 이어집니다.
A PLAY | 말이 머문 자리
평일, 공연이 시작되기 전. 대학로의 작은 테이블에 여섯 사람이 앉았다.
이 기록은 그날 오간 대화를 다섯 개의 장면으로 엮어낸 이야기이다.
Scene 1. 알아보는 마음
┈┈┈┈┈┈┈┈┈┈┈┈┈┈┈┈┈┈┈┈┈┈┈┈┈┈┈┈┈┈
낯선 얼굴들이 특별해지는 순간
❝ 어린 시절의 옛날 얘기 나누면 잠깐 사이 우리는 친구 ❞
— 〈베르테르〉 『우리는』
┈┈┈┈┈┈┈┈┈┈┈┈┈┈┈┈┈┈┈┈┈┈┈┈┈┈┈┈┈┈
좋은 무대를 위해서라면 세상 끝까지라도
첫 질문은 “최근에 본 공연 있으세요?”였다. W는 〈타인의 삶〉을 꺼냈다. 독일 영화를 원작으로 한 연극이다. 7월에 처음 보고 좋아서 8월, 9월까지 다시 찾아갔다. 윤나무 배우의 이전 작품들을 좋아해서 시작한 관람이었는데, 무대의 드라이만은 영화에서 기억하던 인물과 꽤 달랐다. 그 낯선 해석이 오히려 설득력이 있었다고 했다.
영화도 원래 좋아했냐는 물음에 W는 그렇다고 했다. 스크린 속 배우를 볼 때마다 ‘역시 멋있다’ 하며 넘기곤 했는데, 무대까지는 늘 멀었다. 이 말에 자리의 여럿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까운 편이라는 사람에게도 극장은 멀고, 공연 하나를 보러 오가다 보면 다른 공연을 놓치는 날도 생긴다. 좋은 무대를 보려면 세상 끝까지 가야 하는 기분이라는 말이 나왔다.
뜻밖의 재회
그때 문이 열렸다. J와 D였다. “늦을 줄 알았는데.” 먼저 와 있던 S가 놀라 받았다. 호스트가 원래 아는 사이냐고 물었다. S는 같이 극을 보러 다니는 사이고, 알게 된 지 3년쯤 됐다고 했다. 오늘 이 자리에서 만날 줄은 서로 몰랐다. 얼굴 보기 힘들었다는 D의 말에 S는 생각도 못 했다며 웃었다. 이렇게 작은 모임에서도 만나게 되는 것. 그게 진짜 인연이라는 말이 이어졌다.
S는 본격적으로 관극을 시작한 지 오래되지 않았다고 했다. 입문 2년 6개월. 그중 1년 6개월은 주 5일, 하루 두 편씩 풀로 달렸고, 하루 두 편이 버거워지면서 지금은 한 편으로 줄였다. 한때는 일주일에 열 편 안팎을 봤다. 거의 매일 극장에 간 셈이다. 요즘은 많이 줄여서 다섯, 여섯 편이다. 이번 주 스케줄을 묻자 어제부터의 동선을 짚어 나갔다. 어제 낮에 한 편, 저녁에는 〈잔혹동화 생존기〉. 그 전날 저녁에도 같은 작품이었다.
원래는 영화를 더 좋아했다. 장르를 가리지 않고 독립영화부터 현장을 찾아다녔다. 방향을 바꾼 계기는 오랜만에 대학로에 와서 본 한 작품이었다. 배우가 다섯 명 나오는데 캐스팅이 다섯 팀, 총 스물다섯 명이었고, 팀마다 다 잘했다. 연기 잘하는 배우가 이렇게 많구나 싶었다. 그런데 공연 기간이 3개월밖에 남지 않았다. 그 안에 전 캐스트를 다 보겠다고 부지런히 다녔다. 스윙 배우 수준으로 모든 배역을 외울 만큼. 지금도 가장 좋아하는 공연이다. 그 뒤로 좋아하는 작품은 몇 번 바뀌었지만.
기꺼이 슬퍼지려하는 이유
우리는 왜 때로 마음이 먹먹해질 것을 알면서도, 일부러 시간과 마음을 들여 슬픔을 보러 극장으로 향하는 걸까. 일상에서는 꾹꾹 눌러 담아야 했던 감정들이 무대 위에서 비극으로 내달릴 때, 아이러니하게도 마음의 숨통이 트이곤 한다. 가벼운 유희 대신 마음을 짓누르는 비극을 기꺼이 찾아보는 마음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슬픈 공연을 더 좋아하냐는 물음에 몇몇이 그렇다고 했다. L은 배우들이 울고 바닥에서 구르는 장면을 좋아한다고 했다. 일상에서는 겪기 힘든 감정을 무대가 확 보여주는 것. 그래서 밝고 신나는 극은 잘 안 보게 된다. ‘파멸의 파멸의 파멸극’ 같은 작품이 취향이라고 한다. 파멸극 중 가장 좋아하는 건 뮤지컬 ‘브라더스 까라마조프’.
알아보는, 알아주는 마음
‘알아본다’는 것은 팬과 아티스트 사이에서 일어나는 엄청난 스파크다. 관객이 수많은 얼굴 중 단 하나의 반짝이는 아티스트를 알아보듯, 무대 위의 누군가가 객석의 나를 기억해줄 때 계속해서 극장으로 향하게 된다.
J는 화면에서 보았던 배우가 무대에 선다는 소식이 들리면 일단 극장으로 향하곤 했다. 음악극 〈눈이 부시게〉를 서준영 배우 때문에 다섯 번이나 찾았을 때의 일이다. 사인의 순서가 되어 다가선 J에게 배우는 이름을 묻지도 않고 당연하다는 듯 그의 이름을 알아서 적어 주었다. 수많은 관객 중 '나라는 존재'를 정확히 알아봐 준 그 찰나의 경험은 깊은 위로이자 힐링이 되었다. 배우를 뜻밖의 장소에서 다시 마주치는 반가움도 비슷하다. 2018년 뮤지컬 〈록키호러쇼〉의 리프라프 역으로 처음 만나 ‘참 잘하는 배우’라며 가슴에 남겨두었던 강하경 배우. J는 바쁜 일상 속에 잠시 잊고 지내다 드라마 〈취사병 전설이 되다〉에서 주인공의 선임 역할로 툭 튀어나온 그를 발견했을 때, “저 사람이 왜 저기서 나와!” 하고 혼자 반가움을 감추지 못했다. 이번에 뮤지컬 〈브라더스 까라마조프〉의 스메르쟈코프 역으로 돌아온다는 소식에, 예전엔 어려워 넘겼던 작품을 다시 한번 찾아볼까 고민하기까지 했다.
‘알아보는 마음’과 ‘알아주는 마음’은 서로를 향해 달린다. 관객이 무대 위 배우의 열정을 알아보고, 배우가 객석의 나를 알아봐 주는 마음. 어쩌면 공연 예술이라는 생태계를 굴러가게 만드는 진짜 동력은, 서로의 존재를 다정하게 알아채는 이 두 마음의 순환일지도 모른다.
Scene 2. 한 배역, 다른 얼굴
┈┈┈┈┈┈┈┈┈┈┈┈┈┈┈┈┈┈┈┈┈┈┈┈┈┈┈┈┈┈
같은 무대를 봤다고 해서 같은 것을 본 건 아니다
❝ 거울 속에 반전된 이미지 나는 너의 다른 이름 ❞
— 〈팬레터〉 『거울』
┈┈┈┈┈┈┈┈┈┈┈┈┈┈┈┈┈┈┈┈┈┈┈┈┈┈┈┈┈┈
특정 배우에게만 허락된 장면?
S는 큰 기대 없이 봤던 뮤지컬 〈파가니니〉에 마음을 뺏겨 세 캐스트를 모두 챙겨 보았다. 그런데 콘 배우 회차를 먼저 본 지인이 설렘에 차서 어떤 장면을 이야기했을 때, 그는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세 번이나 관람했는데도 도무지 기억에 없는 장면이었기 때문이다.
알고 보니 파가니니가 여주인공 뒤에서 백허그를 하며 바이올린을 잡아 주는 모습은 키 차이가 나는 특정 배우 회차에서만 가능한 특별한 연출이었다.
이렇게 한 관객이 놓친 장면을 다른 관객의 시선이 채워주며 무대의 숨은 매력이 완성된다.
S
“그래서 다양한 후기들이 모이고, 숨겨진 것들도 많이 발견할 수 있는 거죠.”
대체 불가의 존재
자리에 모인 이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칭찬이 자자했던 뮤지컬 〈헬스키친〉이었다. 저마다 다른 캐스트 조합으로 공연을 관람했지만, 배역에 대한 감상과 호평은 자연스럽게 하나의 공감대로 모였다.
특히 단연 '김수하' 배우가 ‘대체불가’로 꼽혔다. 김수하 배우는 모든 면에서 완벽하다며, “처음 보는 사람에게는 무조건 김수하 배우 회차를 권한다”는 확신 어린 추천이 이어졌다.
남자 배역과 조연 캐릭터를 향한 대화도 열기를 띠었다. 실제 나이가 많지 않은데도 묵직한 목소리 톤과 능글맞은 연기로 자연스럽게 '아버지'로 보였던 태이 배우의 반전 매력, 그리고 소극장 시절부터 눈여겨보았던 이하은 배우가 마침내 이번 작품에서 인생 캐릭터를 만나 빛을 발하던 순간까지.
같은 공연을 보았어도 각자 다른 각도로 포착해낸 조각들이 모이면서, 테이블 위의 대화는 더욱 풍성하게 채워져 갔다.
가장 많이 본 작품을 묻자 L은 뮤지컬 〈사의찬미〉를 꼽았다. 열 번이 넘는다. 3인극이라 두 명씩 어떤 조합으로 만나느냐에 따라 극의 결이 완전히 달라지고, 배우가 해석할 여지가 넓어서 올 때마다 다른 작품이 된다. 특히 좋아하는 건 ‘정민’ 배우가 연기하는 ‘사내’. 능글맞게 위에서 상황을 조종하면서도 두 인물이 서로에게 흥미를 잃지 않도록 판을 굴리는 사내다. 가끔 결이 다른 회차를 만나면 ‘내가 기대한 결은 이게 아닌데’ 싶어 곧장 다음 회차를 예매한다.
L에게 ‘이규형’ 배우는 오랫동안 마음 깊이 좋아해 온 배우다. 하지만 대학로 무대에 돌아오지 않은 지는 꽤 되었고, 지난 8월 진행된 콘서트 〈생의 찬미〉 티켓팅마저 아쉽게 실패했다. 비록 지금은 마음속에 ‘구 본진’이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지만, 새로운 회차를 볼 때도 늘 그가 연기했던 인물을 기준으로 무대를 ‘보정’해서 읽어내곤 한다.
어떤 배우를 좋아하냐는 질문에 W는 “지금 제 기준 1위는 윤나무 배우”라며 눈을 반짝였다. 이어 최수진·김재범 배우를 공동 2위로 꼽으며 차기작을 기다린다고 덧붙이는 그녀의 얼굴 위로 애정이 가득 느껴졌다.
Scene 3. 낯선 문 앞에서
┈┈┈┈┈┈┈┈┈┈┈┈┈┈┈┈┈┈┈┈┈┈┈┈┈┈┈┈┈┈
익숙한 방식이 흔들리는 자리
❝ 이해할 수 없어도 좋아할 수 있어요. 설명할 수 없어도 당신이 좋아요 ❞
— 〈레드북〉 『당신도 그래요』
┈┈┈┈┈┈┈┈┈┈┈┈┈┈┈┈┈┈┈┈┈┈┈┈┈┈┈┈┈┈
“진짜 모르겠는데, 진짜 이해는 돼요.”
대화는 자연스럽게 기존의 관극 공식을 깨뜨리는 낯설고 도전적인 작품들로 이어졌다. 그 시작은 창작산실에 올라온 뮤지컬 〈키키의 경계성 인격장애 다이어리〉였다.
경계성 성격장애를 가진 주인공 '키키'의 이야기를 다룬 이 극은, 배우의 성별을 가리지 않는 젠더프리 캐스팅과 토크 콘서트처럼 관객에게 직접 말을 건네는 독특한 형식을 취한다. 주변 인물들 역시 엄마였다가 애인이 되는 등 여러 역할을 넘나들며 키키의 불안정한 세계를 만들어낸다. 작은 자극에도 “나 이제 망했다”며 극단으로 치닫는 키키의 모습에 처음엔 ‘저렇게까지?’ 싶지만, 심리 치료를 받으며 회복해 나가는 과정을 따라가다 보면 아이러니하게도 깊은 이해와 공감이 밀려온다. 증상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더라도 회복하는 법을 배워나가는 결말은, 비슷한 불안을 안고 살아가는 이들에게 “나, 이대로도 괜찮구나” 하는 다정한 안도감을 건넨다.
물론 아쉬움도 있었다. 당장 다시 보거나 남에게 쉽게 추천하긴 어렵지만, 한 번쯤 마음의 경계를 허물고 경험해 볼 만한 가치가 있는 극이라는 데 입을 모았다.
연극 〈화이트래빗 레드래빗〉 역시 낯선 실험성으로 화제가 된 극이다. 배우도 관객도 대본을 전혀 모른 채 무대 위에서 처음 텍스트를 마주하는 극이다. 배우는 평생 단 한 번만 이 무대에 설 수 있으며, 사전 정보 없이 참여해야 한다는 엄격한 규칙이 존재한다.
하지만 이 새로운 시도에도 뜻밖의 맹점이 있었다. 이미 내용을 다 알고 들어온 관객들이 중간에 개입해 분위기를 방해하거나, 배우조차 텍스트를 완벽히 이해하지 못한 채 읽어 내려갈 때 오는 혼란이었다. “이럴 거면 관객의 관람 횟수도 한 번으로 제한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현실적인 아쉬움이 나올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J
“배우도 처음이고 나도 처음이어야 하는데, 이미 다 알고 있는 관객들이 맥을 끊으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극이 던지는 질문은 여전히 유효했다. 매체 연기, 뮤지컬, 정통 연극 등 출신이 다른 배우들이 이 무방비의 텍스트를 각자 어떻게 해석하고 읽어낼지 비교해 보는 재미가 크기 때문이다. 2층 좌석이라 직접 관객 참여에 응하지 못해 아쉬웠다는 한 참석자는 “생각보다 무대와의 호응을 즐기는 편이라, 1층이었다면 더 생생했을 텐데”라며 유쾌한 후기를 덧붙였다. 작가가 전하려 한 진짜 메시지가 무엇인지 여전히 되짚게 만드는, 참으로 도전적인 무대였다.
머리가 아닌 심장이 반응하는 공간
이머시브(Immersive) 공연 이야기가 나오자 테이블의 대화가 한층 뜨거워졌다. 관객이 고정된 객석을 벗어나 공간 안을 거닐며 배우들의 동선을 직접 따라다니는 극. 볼 때마다 전혀 다른 무대를 경험한다는 점이 이 장르의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이다.
L이 최근 경험한 연극 〈슬립 노 모어(Sleep No More)〉는 티켓팅부터 치열했다. 30만 원에 육박하는 고가임에도 매진이었고, 관람 후 식사가 포함된 패키지부터 로비 이용권까지 가격대도 다양했다. 상당한 비용에 망설이다가도 '딱 한 번만 가보자'는 마음으로 극장에 발을 들였다.
하지만 실전은 그야말로 치열한 체력전이었다. 넓은 공간과 끝없는 계단을 오르내려야 하는 데다 공연 시간마저 길었다. 마스크를 써야 하기에 안경보다는 렌즈가 필수라는 현실적인 팁도 더해졌다. 중간중간 의자가 보일 때마다 부지런히 앉아 체력을 비축해야 겨우 끝까지 버텨낼 수 있을 정도다.
무대 위 배우들은 대사 한마디 없이 오직 몸짓으로만 이야기한다. 때로 저희끼리 웅얼거리는 외국어가 들려오지만, 사전 가이드조차 없어 지금 무슨 상황인지 완벽히 파악하긴 어려웠다. 층마다 분위기도 판이하고, 최소 세 번은 봐야 흐름이 잡힌다는 후기를 떠올리면 비용 부담이 아득해진다. 그럼에도 사이키 조명 아래 배우들이 알몸으로 무용하듯 얽히는 클럽 신처럼, 압도적인 실루엣이 가슴을 강렬하게 흔드는 명장면들이 존재했다.
공연은 15분 단위 파트로 순환한다. 주연과 조연, 엑스트라가 얽혀 움직이는데, 자칫 엑스트라를 쫓아가다 배우가 사각지대로 사라져버리면 남은 시간을 홀로 멍하니 서서 보내야 한다. 이 배우를 좇다 놓치고, 저 배우를 따라 위층으로 올라갔다가 빈 방만 마주치기도 한다. 누가 주연인지조차 모호한 채로 극이 끝나버렸지만, 여럿이 흩어졌다 다시 모여 각자의 조각을 맞추어볼 때 느껴지는 방탈출 게임 같은 재미는 상당했다.
특히 배우가 단 한 명의 관객을 선택해 비밀스러운 방으로 데려가는 '원앤원(1 on 1)' 장면은 모두의 로망이다. 누군가는 여러 번 뽑혔다는데, 아쉽게도 선택받지 못해 눈치싸움만 이어졌다.
하지만 L은 이해를 못해도 충분히 아름다웠다고 했다. 아치형 무대 위에서 두 배우가 무용처럼 격렬하게 싸우다, 한 배우가 상대의 몸을 딛고 공중을 걷듯 올라서던 연출. 얼마나 숱한 연습을 거쳤을지 감탄밖에 나오지 않는 그 찰나의 장면 하나만으로도 완벽히 매료되기에 충분했다.
머리로 다 이해하지 못해도 상관없다. 무대는 완벽한 서사가 아닌, 심장이 먼저 알아채는 직관의 공간이기 때문이다. 이해의 경계를 넘어 가슴 깊이 파고드는 그 찰나의 공감.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또다시 극장으로 향할 이유를 이미 얻은 셈이다.
Scene 4. 함께 앉는 법
┈┈┈┈┈┈┈┈┈┈┈┈┈┈┈┈┈┈┈┈┈┈┈┈┈┈┈┈┈┈
함께 공연을 완성하는 방식
❝ 따지고, 따져서 따지고 들면 따지는 널 보며 나 또한 따졌을테 ❞
— 〈틱틱붐〉 『Therapy』
┈┈┈┈┈┈┈┈┈┈┈┈┈┈┈┈┈┈┈┈┈┈┈┈┈┈┈┈┈┈
소란의 여러 얼굴
숨소리조차 내기 힘든 일명 ‘시체관극’ 문화에 대한 지나친 경직성을 경계하고, 보다 자유로운 관람 환경을 지향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써 쌓아 올린 무대의 몰입이 순간의 불청객으로 깨어질 때의 안타까움은 관객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겪어보았을 터.
어떠한 정답을 내리기보다, 이날 모임에서는 객석에서 마주쳤던 각자의 솔직하고 생생한 ‘관크(관객 크리티컬)’ 경험담을 먼저 나누어보기로 했다.
S는 뮤지컬 〈서편제〉를 여섯 번 넘게 관람했을 때의 일을 떠올렸다. 하필 극의 가장 정점이라 할 수 있는 마지막 판소리 대목, 객석에 숨죽인 침묵이 흐르던 그 찰나에 휴대폰 벨소리가 울렸다. 한 공연 동안 무려 네 번이나 벨소리가 울려 퍼진 날도 있었다. 나이 드신 관객이 많은 대극장 낮 공연이라 어느 정도 참아보려 했지만, 이어진 수다와 무대를 향해 혼잣말을 던지는 행동 앞에서는 한숨이 절로 나왔다. 좋아하는 작품을 보러 갔다가 객석의 매너 때문에 회차 자체를 망쳐버린 씁쓸한 기억이다.
L에게 최악의 순간은 뮤지컬 〈사의찬미〉의 스페셜 커튼콜 데이였다. 촬영이 허용된 마지막 회차라 모두가 숨을 죽이고 카메라를 들었던 순간, 한 관객의 카톡 알림음이 연달아 쩌렁쩌렁 울렸다. 공연 중 이미 벨소리가 한 번 울려 객석의 예민함이 극에 달해 있던 터라 타격은 더 컸다.
L
“그날 찍어온 영상은 지금도 차마 다시 보지 못해요.”
하지만 객석의 소란이 언제나 방해만 되는 것은 아니다. 객석의 반응이 오히려 무대의 열기를 완성하는 순간도 있다. 최근 화제가 된 한 연극에서는 시상식 장면에 관객들이 다 같이 콘서트장처럼 환호를 보내며 배우들과 자연스럽게 호흡을 맞추었다. 갑작스러운 벨소리를 위트 있는 대사로 자연스럽게 받아넘긴 센스 있는 배우의 일화도 유쾌한 웃음을 자아냈다.
심지어 약간의 불편함을 주어 조금 밉다가도, 그 마음을 알기에 차마 미워할 수 없는 순간에 대한 이야기도 이어졌다. 바로 어두운 객석에서 어둠을 뚫고 감상을 메모하거나 편지를 쓰는 관객들의 모습이다. 옆자리에서 빛이나 움직임이 느껴지면 ‘미리 좀 써오지’ 싶다가도, J와 D는 “오늘의 이 뜨거운 감정을 놓치기 전에 퇴근길에서 배우에게 꼭 전하고 싶어 하는 그 조급한 마음을 아니까 결국 공감하게 된다”며 입을 모았다.
그렇다면 '이해할 수 있는 소란'과 몰입을 깨뜨리는 ‘관크’를 가르는 진짜 기준은 무엇일까. 길게 이어진 대화 끝에 모임의 의견은 결국 ‘스스로 제어할 수 있는 행동인가’라는 질문으로 모아졌다. 생리 현상이나 기침, 어쩔 수 없는 몸짓, 혹은 오늘의 감정을 꼭 전하고 싶어 안달 난 다정한 조급함은 서로 배려하고 품어줄 수 있는 영역이다. 반면 휴대폰을 습관적으로 들여다보거나 끊임없이 대화를 나누는 것은 ‘안 할 수 있는데 굳이 하는 행동’이기에 타인에게 명백한 피해가 된다는 데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Scene 5. 끝난 뒤 비로소 시작되는 것들
┈┈┈┈┈┈┈┈┈┈┈┈┈┈┈┈┈┈┈┈┈┈┈┈┈┈┈┈┈┈
기록하고, 되새기고, 계속해서 사랑하는 일
❝ 우리 함께 나눈 영혼의 노래들은 그대로 남아 있어 ❞
— 〈멤피스〉 『Steal Your Rock 'n' Roll』
┈┈┈┈┈┈┈┈┈┈┈┈┈┈┈┈┈┈┈┈┈┈┈┈┈┈┈┈┈┈
사랑을 아는 이들의 법칙
가장 최근에 재밌게 본 작품을 묻자 D는 뮤지컬 〈최애가 사라졌다〉를 꼽았다. 별다른 정보 없이 가벼운 마음으로 이른바 ‘찍먹’하러 갔다가 완전히 마음을 빼앗기고 돌아온 극이다. 그 중심에는 도희원 배우의 눈부신 재발견이 있었다. 1인 다역을 완벽하게 소화해 내며, 소심한 학생 역할로 등장했을 때는 네 명의 배우가 모두 무대에 서고 나서야 동일 인물임을 알아채고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덕질 용어를 챕터처럼 풀어주는 친절함, 랜덤 포토카드, 객석을 메운 응원봉의 물결까지. 회전문 관객이 80퍼센트를 차지할 만큼 팬들의 마음에 깊은 공감을 안겨주는 요소로 가득했다.
자연스럽게 대화는 각자의 ‘본진(가장 좋아하는 배우)’과 팬심 이야기로 이어졌다. “최애는 내가 정하는 것이 아니라, 최애가 갑자기 찾아와 심장을 때리며 ‘오늘부터 내가 네 최애다’라고 말하는 것”이라는 명언처럼, 새로운 배우에게 마음을 빼앗기는 일은 늘 예고 없이 찾아온다.
“망설이는 이유가 가격이라면 사고, 사는 이유가 가격이라면 그만둬라”라는 구매의 법칙이나, “티켓을 사면 돈이 사라지지만, 티켓을 안 사도 돈은 어차피 없어지니 공연을 포기하지 말라”는 뼈 있는 유머도 등장했다. 여기에 “밥은 먹으면 지방으로 가지만 굿즈는 내 방으로 온다”는 명언까지 더해지자 테이블 곳곳에서 깊은 탄식과 폭소가 터져 나왔다. 높은 티켓값과 빡빡한 통장 사정 속에서도 관객들이 기꺼이 극장으로 향하고 굿즈를 손에 쥐는 것은, 그 모든 비용을 뛰어넘는 위로와 행복이 그곳에 있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마음 깊이 자리 잡은 ‘본진’이란 그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절대적인 기준점이다. 시간이 흘러 새로운 캐스트와 또 다른 해석들이 무대를 채우더라도, 내 가슴을 완벽하게 뒤흔들었던 최초의 잔상은 영원히 남아 무대를 바라보는 나만의 기준이 된다. ‘휴덕은 있어도 탈덕은 없다’는 진리처럼 무대를 향한 애정은 잠시 쉼표를 찍을지언정 결코 마침표를 찍지 않는다. 본진에게 지쳤을 때 다른 배우의 무대를 보며 마음을 치유받고, 그렇게 새로운 설렘을 마주하며 관극의 생명을 계속 이어간다.
다정한 부지런함
공연이 끝난 뒤 인상깊은 대사와 감정을 간직하는 것은 결코 저절로 되지 않는다. S는 과거 영화 GV(관객과의 대화)에서 늘 첫 번째 질문을 던지며 실시간으로 감상을 정리하던 습관을 공연장으로 가져왔다. 지금은 1막이 끝나자마자 어두운 화장실 한구석에서 휴대폰을 켜고 메모를 남기고, 저녁 공연이 끝나면 새벽을 기꺼이 새우며 후기를 완성한다. 자칫 미루다가는 모든 것들이 한순간에 사라져버리기 때문이다.
기록 방법도 다채롭다. 실시간으로 휘발되는 감상을 빠르게 털어놓기엔 트위터가 좋고, 인스타그램은 이벤트 참여를 위해 좋다. 블로그에는 진중한 후기를, 고화질 영상은 유튜브에 나누어 기록한다.
화장실 한구석에서 시작해 새벽의 블로그까지 이어진 후기들. 찰나를 지켜내려 애쓰고, 나만의 언어로 눌러 담는 관객의 마음이란, 참으로 다정하고도 부지런하다.
오늘 이 테이블에 모여 우리가 나눈 수많은 이야기도, 저마다 어두운 객석과 새벽의 노트 위에 꾹꾹 눌러 담아둔 기록들이 있었기에 피어날 수 있었다.
이야기가 끝을 향해 달려갈 즈음, 호스트가 선물을 꺼냈다. 가방에 달아두면 훗날 극장 로비에서 서로를 알아볼 수 있을 뱃지, 그리고 누군가에게 마음을 전할 때 써내려 갈 볼펜.
“오늘 정말 너무 즐거웠어요”, “앞으로도 이런 자리 만들어 주세요”라는 다정한 인사들이 카페를 메웠다. 공연 시간이 가까워지자, J가 설렘이 섞인 목소리로 질문을 던졌다.
J
“저희 이제 공연 보러 가나요?”
호스트
“네, 늦기 전에 다같이 가시죠!”
환한 미소와 함께 다정한 대답이 돌아왔고, 사람들은 저마다의 짐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공연을 기다리며 테이블 위에서 나누었던 다정한 대화는 마침표를 찍었지만, 진짜 무대는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각자의 가방에 뱃지를 달고 손에 볼펜을 쥐어든 관객들의 발걸음이, 마침내 무대를 향해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그날의 대화는 여기서 끝났지만, 진짜 이야기는 극장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부터 다시 시작됩니다.
우리가 나눈 말들이 머물던 이 자리로부터, 안녕히, 그리고 또 극장에서 만나요!
글 및 정리 | 김예리
사진 및 자료 제공 | 김하연
참석자 | 신상민, 임지수, 조영주, 전지원, 정다온 (히어위아 씨어터 클럽), 김하연, 유나현, 김예리 (히어위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