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가족이 모든 것을 가졌다가 한순간에 모든 것을 잃는다. 그 후에는 무엇이 남을까? 우리는 이런 이야기를 이미 수없이, 수많은 방식으로 보아왔고, 볼 때마다 고통스럽다. 그런데도 왜 우리는 계속 이런 이야기로 돌아오는 걸까? 삶과 맞서 싸우는 것이 어떤 것인지, 모든 것을 잃는 것이 어떤 것인지, 사랑하는 무언가가 속절없이 손에서 빠져나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 어떤 것인지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말이다.
나 역시 한 가족이 한때 가졌던 것, 혹은 가졌다고 믿었던 모든 것을 잃는 일이 어떤 것인지 직접 경험했기에 이 질문을 던진다. 그런 경험은 엄청난 트라우마와 수치심을 남기며, 그와 같은 상실이 남긴 흔적을 안고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지도 나는 알고 있다. 그렇다면 나는 왜 기꺼이 어두운 극장에 앉아, 다른 누군가의 가족이 그 모든 일을 다시 겪는 모습을 지켜보려 하는 걸까?
다른 사람들이 우리가 차라리 외면하고 싶은 일들, 과거에서 지워버리고 싶은 일들을 겪는 모습을 지켜보는 데에는 몹시 불편하면서도 지극히 인간적인 무언가가 있다. 우리가 이런 이야기에 끌리는 것은 자신의 고통과 일종의 트라우마적 유대를 맺었기 때문일까? 우리만 이런 일을 겪는 것이 아니라는 안도감을 찾고 있는 걸까? 우리 안의 어떤 부분은 왜 자꾸만 그 순간으로 되돌아가려 하는 걸까? 끝내 얻지 못했던 답을 찾으려는 희망 때문에, 우리의 마음은 가장 어두운 기억을 다시 들여다볼 필요를 느끼는 걸까?
아마 이 모든 것이 이유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피할 수 없는 문제를 정면으로 꺼내놓고, 이 작품이 품고 있는 도덕적 문제를 들여다보자. 부는 사람을 더 행복하게 만드는가? 우리에게 물려받은 부를 누릴 자격이 있는가? 자신의 삶을 무너뜨린 가족에게도 끝까지 충실할 수 있을까? 그런 일을 겪고도 관계는 살아남을 수 있을까? 돈과 지위, 권력을 모두 잃고 나면 과연 무엇이 남는가?
한 가족이 재산을 잃는 이야기는 여전히 우리를 매혹한다. 《겨울의 사자》, 《더 인헤리턴스》, 《어거스트: 오세이지 카운티》, 《리어 왕》, 심지어 《어레스티드 디벨롭먼트》와 《시츠 크리크》까지 떠올려보라. 상황은 저마다 다르지만 그 밑바탕에 흐르는 긴장은 놀라울 만큼 익숙하다. 부는 권력을 결정하고, 가족은 우리가 어디에 속하는지를 결정한다. 그러나 부를 걷어내고 나면, 그 소속이 실제로 얼마나 단단한 것이었는지가 드러난다. 냉혹한 진실은 애정과 집착이 상대를 움직이는 수단이 될 수 있고, 그렇게 되면 함께 쌓아온 과거마저 상대를 공격하는 무기로 바뀔 수 있다는 것이다. 가족 드라마란 결국 가장 가까운 관계 안에서 벌어지는 권력 투쟁이다. 그리고 그 끝에 《벚꽃 동산》이 있다.
1903년 안톤 체호프가 집필하고 이듬해인 1904년 1월 17일 모스크바 예술극장에서 초연된 이 작품은 영지와 함께, 이제는 과거를 상징하게 된 사랑하는 벚꽃 동산을 잃을 위기에 놓인 한 귀족 가문을 그린다. 가족은 앞으로 무슨 일이 닥칠지 알고 있으면서도 속수무책으로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는다. 필사적으로 추억에 매달린 채 결정을 미루고 또 미룬다. 자신들이 지금껏 살아온 삶과는 전혀 다른 방식의 삶을 상상하는 능력마저 잃어버린 것이다.
체호프가 이 작품을 희극으로 구상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는 향수에 너무 깊이 사로잡힌 나머지 주변 세계가 변해가는 현실조차 외면하는 부유층을 웃음의 대상으로 삼았다. 가문의 재산이 사라질 것이라는 사실은 모두가 알고 있다. 그런데도 가족은 행동에 나서기는커녕 울고 떼를 쓸 뿐이다. 마치 미래가 아무런 대가도 요구하지 않을 것처럼 살아간다.
그렇다면 이토록 러시아적인 이야기를 현대 한국으로 옮겨오면 어떻게 될까? 사이먼 스톤의 각색작은 LG아트센터와 애들레이드 페스티벌이 공동 제작한 작품으로, K-연극을 세계 무대에 알리기 위한 야심찬 프로젝트로 출발했다. 서울에서 시작해 홍콩, 싱가포르, 애들레이드를 거친 성공적인 글로벌 투어는 파크 애비뉴 아모리에서의 대규모 공연을 끝으로 막을 내린다. 뛰어난 한국 배우들이 한국어로 연기하고 영어 자막이 제공되는 이 작품은 체호프의 세계를 생동하는 동시대적 문화의 맥락 속에 새롭게 자리매김한다.
한국어를 말하지도, 읽지도, 쓰지도 못하는 미국인 관객인 나에게 이 공연은 평소와는 다른 방식의 관람을 요구했다. 순간순간 빠르게 선택해야 했다. “자막을 읽으며 대사를 따라갈 것인가, 아니면 무대 위에서 벌어지는 일에 집중하며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와 그 흐름을 믿을 것인가?” 처음에는 둘 다 따라가려 했지만, 어느 순간부터 무대 위에서 벌어지는 행동과 배우들의 움직임에 집중하게 되었다.
몸은 종종 말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한다. 이것은 스톤의 각색에서 반복해서 나타나는 특징이다. 누군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는 것과 그 말에 담긴 진짜 의미를 이해하는 것 사이에는 미묘한 간극이 있다는 사실을 선명하게 의식하게 된다. 바로 그 간극과 섬세함 속에서 이처럼 빼어난 연극은 비로소 생명력을 얻는다.
한국어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무언가를 놓치고 있다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다. 언어를 모르는 대신 포기해야 하는 것이 있었지만, 그만큼 다른 방식으로 얻는 것도 컸다. 이 배우들 덕분에 나는 대사의 의미를 좇기보다 내가 느끼는 감정에 깊이 집중하고, 그것을 나 자신의 경험과 연결해 받아들일 수 있었다. 배우들이 섬세한 뉘앙스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고 전달해준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다. 분주하게 움직이는 무대를 지켜보면서 동시에 자막까지 따라가려면 상당한 집중력이 필요하다. 하지만 위기에 처한 가족을 알아보는 데 모든 말을 이해할 필요는 없었다. 그리고 이 가족은 누가 봐도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다.
이 배우들의 연기는 놀라웠다. 가족의 중심인 송도영(체호프의 라네프스카야)을 연기하는 전도연은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하다. 그는 이 인물이 지닌 모순된 면모를 선명하게 드러낸다. 매력과 자기중심성, 슬픔, 그리고 자신의 주변에서 사라져가는 세계를 놓지 못하는 집착까지. 도영은 과거에 갇혀 있다. 본질적으로 이미 생명력을 잃어버린 삶에 이토록 깊은 애착을 품고 있는 인물을 바라보는 데에는 묘한 매혹이 있다.
그 맞은편에는 황두식(체호프의 로파힌)을 연기하는 박해수가 있다. 새롭게 얻은 힘으로 가족의 재산과 사회적 지위를 위협하는 사업가다. 도영이 기억에 사로잡힌 인물이라면, 두식은 가족이 필사적으로 외면해온 냉혹한 현실을 대변한다. 박해수의 연기는 대담하고 역동적이다. 그의 내면에 에너지가 빠르게 축적되다가, 마침내 자신의 본모습을 드러내고 모든 주도권을 거머쥐는 폭발적이면서도 가슴 아픈 순간에 정점에 이른다.
이러한 권력관계의 역전은 단순히 경제적인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지극히 개인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평생 부와 특권이라는 유리벽 너머를 바라보며 살아온 남자가 이제 그 유리벽을 깨뜨리고 있다. 그리고 이제 가족의 운명을 결정할 힘은 그의 손에 있다.
전도연과 박해수의 극명한 대비는 공연 전체에 팽팽한 긴장감을 불어넣는다. 과거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는 결코 단순하지 않으며, 어느 쪽을 택하든 그에 따르는 대가는 크다. 도영의 오빠 송재희 역을 맡은 손상규는 대사가 많지 않음에도 강렬한 존재감을 남긴다. 강해나 역의 이지혜는 젊은 세대의 생기와 에너지를 대변하며, 특히 화려한 생일 파티 장면에서 그 매력이 두드러진다. 스톤의 작품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여러 인물의 대사가 서로 뒤엉키고, 술에 취한 말들이 흐려지는 가운데 감춰졌던 비밀과 욕망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내면서, 가족 역시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한다.
체호프의 희곡에서 중심을 이루는 과수원에는 유독 애틋한 정서가 깃들어 있다. 체호프는 열정적인 정원사였으며, 멜리호보의 시골 영지에서 지내며 자연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었다. 작품 속 과수원은 몰락해가는 상류층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우리가 오랜 시간 정성껏 가꾸고 애정을 쏟아온 것들도 결국 사라질 수 있다. 우리는 아름다움에 매료된 나머지 그것이 우리보다 오래 남으리라 믿는다. 그러나 우리가 사랑하는 모든 것이, 그 가치를 전혀 알아보지 못하는 누군가에 의해 한순간에 사라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에는 묘한 비애가 따른다. 이 가족이 잃는 것은 단순히 재산이나 과수원만이 아니다. 과거와 이어져 있던 살아 있는 연결고리 자체가 영원히 끊어지는 것이다. 한 세대가 애지중지하며 끝내 놓지 못하는 것을, 다음 세대는 중요하지도 필요하지도 않은 것으로 여긴다.
독자 여러분, 이 점만은 분명하다. 나는 평생 한 번 만날까 말까 한 이 배우들에 대해 얼마든지 더 이야기할 수 있다. 공연이 시작되는 순간부터 배우들은 작품 속으로 거침없이 뛰어들어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 그 에너지는 놀라울 정도다. 이 작품에 불을 붙인 것은 다름 아닌 배우들이다. 공연 내내 강렬한 에너지가 한순간도 느슨해지지 않으면서도 결코 과하게 치닫지 않는다. 이 배우들의 연기는 놀라울 만큼 정교하고 완성도가 높으며, 감히 말하자면 비할 데가 없다.
스톤의 각색은 관객에게 어느 한쪽을 택하도록 강요하지 않은 채 희극과 비극 사이를 자유롭게 오간다. 모두가 말하고 있지만 정작 누구도 서로의 말을 듣지 않는 이 가족의 혼란은 대사와 행동을 통해 생생하게 드러난다. 상황이 더는 견디기 어려울 만큼 치달을 때 오히려 웃음이 터져 나온다. 인간은 바로 같은 순간에 터무니없이 우스꽝스러우면서도 가슴 아픈 존재가 될 수 있다. 이것이 쉽게 받아들이기 힘든 모순된 진실이다.
그렇다면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게 된다. 우리는 왜 이런 이야기를 계속 지켜보고 싶어 하는가? 고통을 즐기기 때문일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우리는 그 고통을 이해하고 싶은 것이다. 사람들이 평생 외면해온 것들과 끝내 정면으로 마주해야 할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보고 싶어 한다. 가족을 하나로 묶어주던 조건들이 무너진 뒤에도, 그들은 여전히 가족으로 남을 수 있을까?
그들의 입장이라면 나는 어떻게 했을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이 가족이 모든 것을 잃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내 가족을 떠올리지 않는 것 역시 불가능했다. 이것이 내가 마주한 불편한 진실이다. 이야기가 미처 다시 들여다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기억에 닿을 때 불현듯 찾아오는 깨달음이다. 나는 나와 전혀 다른 세계에서,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낯선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그 모든 감정을 느끼고 이해할 수 있었다.
나는 그 수치심을 알아보았다. 부정하려는 마음도, 모든 것을 예전으로 되돌릴 수 있다고 믿고 싶은 마음도, 같은 실수를 끊임없이 반복하는 사람들을 지켜보며 느끼는 지침도 알아보았다. 진정한 변화란 결국 이전의 삶과 그 삶이 내게 안겨주었던 모든 것이 이제는 사라졌음을 인정하는 데서 시작된다. 가족이라는 이유로 느끼는 의무감은 때로 자신을 옭아매는 족쇄가 될 수 있다. 받아들인다는 것이 반드시 굴복을 뜻하지는 않으며, 용서한다고 해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행동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이 자신에게 중요한지를 포기하지 않고도 가족을 사랑할 수 있다. 우리 주변의 모든 사람은 저마다의 과거와 실망을 안고 살아간다. 모든 이야기가 언제나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은 아니다.
나는 고통과 상실이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고통과 상실이 없다면, 과연 삶의 아름다움을 온전히 감사할 수 있을까? 《벚꽃 동산》은 잿더미에서 되살아나는 불사조처럼 시대마다 새롭게 이야기되며 생명력을 이어간다. 우리가 자신을 넘어 더 큰 삶의 모습을 바라보게 하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이해하고자 하는 이 깊은 욕구는 인간으로 존재하는 한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가족을 선택할 수 없을지 모르지만, 그들과의 관계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지닐지는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 삶에서 그 무엇도 보장되어 있지 않기에, 가족이 고통을 겪은 뒤 더 현명해지거나 더 다정해지거나, 혹은 조금이라도 달라질 것이라는 보장 역시 없다. 체호프는 삶의 비극에 쉬운 해답을 내놓거나 섣부른 위안을 건넨 적이 없으며, 스톤의 각색은 그 원칙을 충실히 따른다.
우리가 이런 이야기로 거듭 돌아오는 것은 여전히 우리 자신의 이야기를 이해하려 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우리에게도 다시 시작할 가능성이 남아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우리는 지켜본다. 우리는 자신의 고통을 누군가가 알아봐 주기를 바라며 기꺼이 그 고통과 마주한다. 그리고 그 고통을 진정 마음 깊이 받아들인다면, 다른 사람들의 고통 역시 조금 더 깊이 이해하게 된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많은 부와 높은 지위를 누려도, 시간을 되돌리거나 더 많은 시간을 얻을 수는 없다. 나는 《벚꽃 동산》을 꽤 여러 번 보았지만, 공연이 조금만 더 계속되기를 바랐던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놀랍다는 말로도 부족하다. 이것만은 확실히 안다. 우리는 언제나 다시 그 동산으로 돌아올 것이다.
공연 사진 ©Stephanie Berge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