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 케인은 스물여덟 살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케인에 대해 이야기할 때면 많은 이들이 바로 그 지점에서 출발하기 쉽다. 우울증과 고통, 그리고 그녀의 작품을 둘러싼 주요 화두가 되어버린 비극적인 죽음의 정황에서 말이다. 하지만 나는 그곳에서 시작하지 않으려 한다. 나는 케인이 연극을 통해 무엇을 하고자 했는지에서 출발하고 싶다.
케인은 본래 시인이 되고 싶어 했다. 그러나 시만으로는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모든 것을 담아낼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대신 연극에 이끌렸다. 그녀는 “연극에는 기억이 없다. 그렇기에 연극은 모든 예술 가운데 가장 실존적이다”라고 썼다. 이 문장은 마치 《Cleansed》를 위한 선언처럼 느껴진다.
케인은 연극의 본질적인 힘을 이해하고 있었다. 때로 이미지는 언어로는 결코 닿을 수 없는 방식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는 것이다. 우리는 무언가를 직접 보아야만 비로소 자신이 무엇을 느껴왔는지 이해할 수 있다. 그렇기에 나는 케인의 작품을 단순히 그녀의 우울증, 혹은 결국에는… 그녀의 죽음이라는 렌즈를 통해서만 이해하려는 시각을 거부한다.
런던에서 《Cleansed》를 보았을 때, 나는 병이나 절망에서 비롯된 글을 쓰는 극작가를 보지 않았다. 내가 느낀 것은 연결되고자 하는 인간의 욕구—어딘가에 속하고, 누군가에게 보이고, 사랑받고자 하는 욕구—에 온 마음을 내맡긴 한 사람의 심장이었다. 나는 연극을 통해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만들려는 한 여성을 느꼈다. 알메이다 시어터의 《Cleansed》는 바로 그 일을 해냈다.
케인의 죽음이 그녀의 작품과 마주하는 수많은 순간에 그림자를 드리워온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녀를 둘러싼 어둠을 지나치게 가까이 들여다본 나머지, 정작 그녀가 우리에게 보여주려 했던 것을 충분히 바라보지 못해온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Cleansed》는 결국 사랑에 관한 연극이다. 등장인물들이 겪는 학대와 신체적 폭력, 굴욕, 고문을 비롯한 수많은 참혹한 일들이 우리로 하여금 달리 생각하게 만들 수도 있지만, 그 모든 것의 뿌리에는 사랑이 있다. 《Cleansed》의 인물들에게 한 가지 중요한 공통점이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기 위해 그리 깊이 파고들 필요는 없다. 그들은 망가진 사람들이 아니다. 다만 모두 마음이 부서진 사람들이다. 내가 보기에 이것이야말로 이 작품을 이해하는 데 가장 핵심적인 지점이다.
이 프로덕션이 내게 가장 깊은 울림을 준 것은 케인의 상징적인 무대 지시가 놀라운 마법처럼 구현되는 순간이었다. 지금껏 내가 경험한 연극적 순간 가운데 가장 감동적인 장면 중 하나였다. 원래 구상대로라면 무대 바닥을 뚫고 해바라기가 솟아오르는 장면이지만, 이 공연에서는 무대 전체가 뒤로 물러나며 수선화가 가득한 들판을 드러냈다. 그 광경이 펼쳐지는 순간, 나는 눈물을 흘렸다.
물론 슬픔의 눈물이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안에는 기쁨도 있었다. 환희, 그리고 혼돈과 고통 한가운데서 전혀 예상치 못한 생명과 마주했을 때의 순수한 아름다움. 이제는 숨을 멈추지 않아도 된다는 듯한 손짓. 살아가라는 손짓. 그 모든 감정 아래에서 나는 여전히 상심으로 인해 울고 있었다.
수선화가 모습을 드러냈다고 해서 내가 목격한 것들이 지워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 꽃들은 고통과 상심 속에서 피어난 것이기 때문이다. 이 차이는 중요하다. 이 작품은 사랑에 관한 연극이기 때문이다. 그뿐이다.
《Cleansed》는 사랑을 감상적으로 그리지 않는다. 오히려 사랑을 위험한 것으로 만든다. 사랑은 많은 일을 할 수 있다. 우리를 과거로부터 해방시키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 안에 우리를 가두기도 한다. 지금껏 그 어느 때보다 생생히 살아 있음을 느끼게 하는 동시에, 차마 마주하고 싶지 않은 우리 안의 어둡고 상처 입은 부분을 드러내기도 한다.
《Cleansed》에서 사랑은 때로 육체적인 고통으로 느껴진다. 몸은 움직일 수 없는데 정신만은 깨어 있게 만드는 힘. 심장의 마비. 사랑은 여러 곳에서 올 수 있지만, 가장 힘겨운 사랑은 흔히 자기 자신을 사랑하려는, 불가능해 보이는 싸움에서 비롯된다. 운 좋게도 사랑이 우리 자신을 선명하게 느끼고 바라볼 수 있도록 해준다면, 어쩌면 우리는 사라졌다고 생각했던 무언가를 자기 안에서 다시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위대한 현대 예술가 트레이시 에민이 2007년 빛나는 네온 작품을 통해 보여주었듯, “나는 나의 순수함을 사랑할 수도 있었을 텐데(I could have loved my innocence).” 수선화가 가득한 들판이 모습을 드러내던 순간 내가 느낀 것을, 지금으로서는 이보다 더 잘 표현할 수 없다.
그 수선화는 앞서 펼쳐진 공포로부터의 도피가 아니었고, 등장인물과 관객이 겪은 상처를 되돌리지도 않았다. 그저 모습을 드러내 고통에 갑작스레 의미를 부여하거나 모든 것을 괜찮게 만들어준 것도 아니었다. 그저 모습을 드러냈을 뿐이다. 그리고 그것만으로도 충분하고도 남았다.
나에게 그 이미지는 연극을 관람한 경험과 거의 떼어놓을 수 없는 것이 되었다. 아름다움이 공포를 대신한 것은 아니었다. 두 가지는 처음부터 줄곧 함께 존재하고 있었다. 나는 바로 이것이 케인이 연극에 대해 그토록 깊이 이해하고 있던 지점이라고 생각한다.
케인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설명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고, 실제로 설명하기를 거부했다. 알메이다 시어터의 《Cleansed》 공연 전반에 걸쳐 이미지들은 우리 앞에 제시되었고, 우리는 그 안의 모순과 상심을 스스로 경험할 수 있었다. 나에게 수선화는 정답인 척하지 않는 가능성의 상징이었다. 일종의 새로운 시작이었지만, 우리가 연극에서 흔히 보는 깔끔하고 단순한 방식의 새 출발은 아니었다.
어둠은 아무런 희생도 남기지 않은 채 그저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나는 케인의 작품을 그녀의 생애만으로 환원하기가 어렵다. 그녀의 삶은 중요했고, 물론 그녀의 죽음 역시 중요하다. 그렇지 않은 척하는 것은 솔직하지 못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Cleansed》는 작가의 짧았던 삶을 둘러싼 정황을 넘어 존재할 가치가 있으며, 또한 그렇게 존재하기를 요구한다.
케인에 대한 나 자신의 감정을 들여다보면, 《Cleansed》를 끊임없이 따라다니며 형성하는 것이 단순히 하나의 감정으로서의 상심이 아니라, 하나의 실존적 조건으로서의 상심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우리가 사랑할 수 있는 능력과 그 사랑을 받아들이고, 지속시키고, 끝내는 그 사랑으로부터 살아남을 수 있는 능력 사이의 공간 말이다. 나에게 그것은 깔끔하게 설명할 수 있는 무언가가 아니다.
그리고 관객들이 극장을 빠져나가던 짧은 순간, 나는 케인이 “바로 이렇게 하는 거야”라고 속삭이는 소리를 들었다고 맹세할 수 있다. 《Cleansed》는 한 편의 연극 그 이상이다. 하나의 감정이다. 그리고 그 감정은 사랑이다.
이 프로덕션을 이토록 세심하게 다뤄준 알메이다 시어터에 깊은 감사와 경의를 표한다. 두려움 없는 정밀함과 솔직함으로 작품을 이끈 레베카 프레크널에게도. 케인의 작품을 순화해서도, 자극적으로 과장해서도 안 된다는 것을 이해한 뛰어난 창작진에게도. 그리고 신뢰와 솔직함, 취약함, 헌신으로 무대를 가득 채운 놀라운 배우들에게도.
이토록 완전한 신뢰와 서로를 향한 배려를 지닌 배우들이 한 무대에 함께하는 모습을 나는 본 적이 없다. 그들이 만들어낸 것은 내가 극장을 떠난 뒤에도 오래도록 마음에 남았고, 평생 나와 함께할 것이다.
공연 사진 ©Marc Brenne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