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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아가는 몸과 지워진 시간 위로 '다시(更)' 쓰는 생존 — DAC Artist 본주 작·연출가 인터뷰

Yeri Kim

Yeri Kim

2026. 09. 07 23:01Views 18

자신의 가장 내밀하고 아픈 경험들을 기꺼이 무대 위로 꺼내놓는 창작자가 있다.

폭력과 생존의 궤적을 예리하게 포착하면서 종국에는 늘 삶을 껴안으려는 사람.

연극 〈공동창작 실패 다큐멘터리: 생존자프로젝트는 생존할 수 있을까?〉로 2024년 동아연극상 신인연출상을 수상하며 동시대에 묵직한 화두를 던져온 본주다.


만 서른아홉, ‘조기 갱년기’라는 지극히 자전적인 상실의 경험에서 출발한 신작 연극 〈갱更〉.

막 첫 공연을 시작한 두산아트센터 Space111 극장에서 그를 만났다.

낡아가는 몸과 불완전한 세대들이 부딪히는 무대 위 조리실을 구상하며, 그는 무엇을 ‘다시(更)’ 건져 올렸을까.

그가 발견한 삶의 의미를 따라가 보았다.


(프로필-백)DAC Artist 본주 신작_갱更.jpg




‘청년’과 ‘조기 갱년기’, 경계에서 묻는 삶


본주는 지난 2025년 두산아트랩을 통해 연극 〈8월, 카메군과 모토야스 강을 건넌 기록〉의 낭독 공연을 선보인 바 있다.

과거 경험에 대한 기록물에서 파생된 당시의 작업과 달리, 이번 DAC 아티스트로서 선보이는 신작 〈갱更〉은 시작점부터 그 궤를 달리했다.


"두산아트랩 공연이 개인적인 기록물에 기반한 낭독극이었다면, 〈갱更〉 은 두산아트센터와 처음부터 함께 출발했어요.

공연 기간도 두산아트랩 공연은 3일로 짧았어요. 하지만 〈갱更〉 은 작품에 담긴 주제 의식을 고민할 수 있는 시간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가 가장 깊숙이 파고든 주제는 다름 아닌 자신의 ‘몸’이었다.

공교롭게도 ‘청년 예술가’로서 참여할 수 있는 마지막 나이 제한의 끝자락에 서 있던 서른아홉의 겨울,

그에게 찾아온 ‘조기 갱년기’라는 신체의 변화는 단순한 건강상의 문제를 넘어 사회적 경계와 범주에 대한 본질적인 의문으로 확장되었다.


"2023년 병원에서 처음 진단을 받고 참 얼떨떨했어요. 전 스스로를 완벽히 '청년 예술가' 혹은 젊은 세대로 인지하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갑작스레 그 경계 밖으로 훌쩍 넘어오고 나니 아무런 대비가 안 되어 있는 거예요. '

나는 이제 청년 예술가가 아닌가? 나를 어떤 세대로 정의 내릴 수 있을까?'라는 혼란이 컸죠.

우리는 흔히 사람들을 특정 세대로 묶어 정의하려 하지만,

결국 한 사람을 어떤 하나의 세대로 납작하게 정의 내리기는 무척 어렵다는 걸 깊이 들여다보게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처음부터 '이런 이야기를 꼭 해야지!' 했던 건 아니었어요.

지금 이 시점에 내가 가장 잘 알고 있는 감각에서 출발하되,

그것을 연극화하기 위해 주변의 것들을 어떻게 포함해서 갈 수 있을까 고민하며 창작했습니다.”


(프로필-흑)DAC Artist 본주 신작_갱更.jpg




실패와 상처를 무대로 부르는 일


성공담도 영웅담도 아닌 뼈아픈 자신의 실패와 자전적 기록을 무대에 올리는 작업은 엄청난 용기를 요한다.

부끄러운 기록을 세상에 내어놓는 일은 그에게 어떤 의미일까. 본주는 담담한 목소리로 진심을 꺼내놓았다.


"아름답고 좋은 이야기들이 있잖아요. 뭔가 다른 사람들과 극장에 모여서 조금 더 긍정적인 에너지나 메시지를 나눌 수 있는 이야기도 있는데,

개인적으로 그냥 저라는 창작자 개인에게 발화점은 거기에 찍혀 있지 않은 것 같더라고요.

'아, 이 얘기를 해보고 싶다. 그리고 이 얘기를 누군가와 나누고 싶다'라는 저의 출발이

좀 더 어두운 면에 방정식이 찍혀 있다는 걸 최근 들어서 더 진하게 느끼고 있어요."

 

비록 스스로를 깎아내고 고통스럽게 하는 이야기일지라도,

그녀가 이 힘든 자처를 이어가는 이유는 이것이 곧 자신의 연극 작업이 가진 진짜 의미이기 때문이다.


"연극을 한다고 해서 상처나 고민이 해소되는 건 단 하나도 없어요(웃음).

시작을 안 해야, 연극 작업으로 이걸 꺼내 보지 않아야 덜 고통스러웠을 텐데,

꼭 굳이 또 그 이야기를 시작을 해서 유달리 힘든 시간을 스스로 자처하는 것 같기는 해요.

하지만 쉽지는 않더라도 그것을 기꺼이 꺼내서 이야기하는 것이 저에게는 제가 하는 작업의 의미가 있다고 스스로 느끼는 거 같더라고요."


(홍보사진-손)DAC Artist 본주 신작_갱更(두산아트센터).jpg




극작과 연출, 쓰고 덜어내며 완성되는 싸움


하나의 작품 안에서 글을 쓰는 ‘작가’와 무대를 책임지는 ‘연출가’의 역할을 동시에 수행한다는 것은,

어쩌면 매일 스스로와 가장 치열한 전쟁을 치르는 일일지도 모른다.

머릿속으로 무한한 우주를 넓혀가려는 자아와, 무대라는 좁고 물리적인 프레임 안으로 냉정하게 깎아내야 하는 자아가 끊임없이 부딪치기 때문이다.

본주는 "작가는 세계와 타인을 향해 계속 이야기를 확장해 나가는 사람이라면, 연출은 그 확장을 줄이고 잘라내는 사람"이라며, 내면에서 일어나는 자아 충돌이 창작 과정에 녹아있다고 고백했다.


"텍스트 수정을 정말 많이 했어요. 극장에 들어오기 전까지도 계속 이어졌죠.

예를 들면 대본을 쓸 때는 서사를 뒷받침하기 위해 ‘피영’이 겪었던 가정폭력이나 ‘금옥’의 과거 전사들을 촘촘히 심어두었어요.

그런데 실제로 연습을 거듭하면서, 관객들이 조리실 안 인물들의 '현재의 관계성'에 집중하게 만드는 게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결국 그 전사들은 전부 들어냈습니다.


(공연사진)DAC Artist 본주 신작_갱更(두산아트센터) (10).jpeg


조리실의 핵심 재료인 고기나 채소를 무대 위에 직접 올리지 않고, 배우들의 정교한 마임(Mime) 연기로 처리한 것도 비슷한 결의 연출적 결단이었습니다.

대본을 쓸 때는 일부러 '이걸 나중에 무대에서 마임으로 연출해야지' 하고 미리 계산하지 않고 썼거든요.

내가 연출할 이미지까지 미리 염두에 두고 글을 쓰기 시작하면 저 스스로가 연극적인 이미지 텍스트를 검열하고 경계하게 돼요.

결국 '식재료를 마임으로 비시각화한다'는 연출적 장치는, 본격적으로 무대를 만들면서 결정했어요.

썩어 없어질 식재료들을 무대 위에서 과감히 치워버림으로써, 정작 조리실 안에서 소모되고 가공되는 '인간의 몸'을 관객에게 더 똑똑히 보여주고 싶었거든요.

세계를 활자로 무한히 확장해야 하는 작가의 고충과, 그것을 무대라는 물리적인 한계 속에서 증명해야 하는 연출가의 고충은 전혀 다른 차원이에요.

제가 속한 극단에서 늘 극작과 연출을 병행해 왔기에 꽤 익숙하다고 생각했는데도,

이번 작업만큼은 유독 어느 쪽이 더 어렵다고 쉽게 견줄 수 없을 만큼 모두 어려웠어요.”




양면형 객석으로 구현한 소통의 사각지대


본주는 이번 작품에서 무대를 사이에 두고 관객이 서로를 마주 보는 '양면형 객석'을 채택했다.

관객은 필연적으로 보이지 않는 사각지대를 경험하게 된다.

연출가의 의도대로 시선을 통제할 수 있는 일방향 프레임을 포기하고, 양면 객석을 선택한 연출적 의도를 물었다.


"양면형 객석은 연출가에게 정말 지옥 같은 고통을 안겨줍니다(웃음).

객석이 일방향이었다면 연출가로서 특정 순간에 인물의 어떤 표정을 보여줄지, 언제 감출지 통제하고 설계할 수 있거든요.

하지만 양면형 객석은 누군가가 배우의 앞모습을 볼 때, 반대편 관객은 그 배우의 등만 보게 되는 식으로 시선의 불균형과 차이가 발생할 수밖에 없어요.

그리고 저는 이 차이를 포함해서 가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공연사진)DAC Artist 본주 신작_갱更(두산아트센터) (8).jpeg


작품에 등장하는 여섯 명의 인물들은 20대부터 80대까지 각자가 거쳐온 삶의 시공간과 체득한 사회적 노동의 가치관이 극명하게 다른 세대들이잖아요.

서로가 서로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죠.

관객들 역시 마주 보는 양면 객석에 앉아 '우리는 타인의 지극히 일부분, 단면밖에 볼 수 없다'는 물리적 한계를 온몸으로 감각하길 바랐습니다.

무대 위에서 인물들이 겪는 몰이해가, 관객들이 앉은 자리의 물리적 시야와 그대로 포개어지도록 설계하고 싶었어요.

연출가로서는 배우들에게 동선이나 시선을 고정해 주는 방식을 일부 열어두었어요.


대신 무대 위에서 '미리 정해두지 않고 움직이기 위한 장면별 목표’를 나누었죠.

사실 좁은 조리실 안에서 100개가 넘는 소품이 오가기 때문에 안전을 위한 최소한의 규칙(시작점과 끝 지점)은 아주 엄격하게 묶어두어야만 해요.

하지만 그 규칙을 제외한 중간 과정은 일부러 아무것도 확정 짓지 않고 출발했습니다.

연출가에게 동선을 고정해두지 않는 것만큼 불안하고 어려운 도전은 없지만, '약속을 하지 않기 위해 정교한 약속'을 세운 셈이에요.”

 



구역질 나는 일상을 삼키고, 기꺼이 다시(更) 살아낸다는 것


작품의 제목이기도 한 '갱(更)'은 '낡아가는 것(갱년기)'과 '다시 고쳐지는 것'이라는 반대되는 이미지가 한 단어 안에 위태롭게 공존하는 이중적 단어다.

작가 노트의 마지막 문장, “그렇게 나를 먹고, 다시(更), 삽니다”는 조리실 안에서 끊임없이 무언가를 짓이기고 삼켜내야 했던 인물들.

본주는 이 엔딩이 작품의 완결된 마침표가 아니라 긴 '쉼표'이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공연사진)DAC Artist 본주 신작_갱更(두산아트센터) (9).jpeg


"마지막 엔딩 씬은 이 작품의 마침표가 아니라 '쉼표'라고 생각해요.

극이 막을 내리고 관객분들이 각자의 일상으로 돌아갔을 때, 이 '다시'라는 메시지가 마냥 찬란한 희망이거나 긍정적인 위로가 될 수는 없을 거예요.

일상은 내일도 계속 비슷할 거고, 계속 힘들 테니까요.

하지만 무대 위에서 힘들고 추한 단면을 직면하면서도 그것을 기꺼이 수용하고 딛고 나아가는 인물들을 한 번 목도하셨으니,

관객분들도 내 삶의 못나고 아픈 순간을 견뎌낼 수 있는 아주 작은 힘을 얻어 가셨으면 좋겠어요.


주변에서 해피엔딩이 아니라서 아쉬워하시는 분들이 많더라고요.

하지만 이들이 지지고 볶고 싸우다 결국 부도덕하고 바보 같은 선택에까지 다다르는 그 못난 삶의 궤적을 관객들이 똑똑히 보았잖아요.

그럼에도 내일을 향해 다시 딛고 살아가는 진짜 생동감 있는 희망은, 극장이 아닌 관객 여러분의 내일의 일상에서 직접 발견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그걸 굳이 무대 위로 불러와서 위선적으로 포장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 제 연출적 의도이기도 해요."

 

(공연사진)DAC Artist 본주 신작_갱更(두산아트센터) (1).jpeg


결국 이 연극에서 '삼킨다'는 행위는 현실에 대한 굴복이나 도망이 아니다.

썩어 없어질 비루한 식재료들을 마임으로 지워낸 무대 위에서, 결국 증명할 수 있는 것은 이 닳고 소모되어 가는 정직한 우리의 '몸'뿐이라는 처절한 깨달음이다.

앞선 세대의 땀과 피, 그리고 나 자신의 허물까지도 더 이상 거부하며 구역질하지 않고 기꺼이 내 안으로 안아 들여 스스로 책임지겠다는 결단인 셈이다.


불완전하고 매끄럽지 않은 일상일지라도, 추하고 부끄러운 나 자신의 단면마저 기꺼이 끌어안고 책임질 때 비로소 우리의 진짜 '갱(更)'이 시작된다.

좁고 뜨거운 조리실에서 잔혹한 생존의 무게를 버텨내는 인물들의 고군분투는, 역설적이게도 우리에게 다시 서로를 응시하며 살아갈 묵직한 용기를 건넨다.


우리의 궤적이 매끈하게 아름답지 않아도 괜찮다. 우리, 다시!


(무대사진)DAC Artist 본주 신작_갱更(두산아트센터) (3).jpeg



연극 〈갱更〉은 9월 2일부터 9월 20일까지 두산아트센터 Space111에서 공연됩니다.


사진 제공 ⓒ 두산아트센터


Yeri Ki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