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완전한 신체들이 써 내려간 생존의 기록
극단 ‘생존자프로젝트’의 대표이자 2024년 제61회 동아연극상 신인연출상을 수상하며 동시대 연극계에서 가장 용감한 시선을 보여준 본주 작가가 신작 연극 〈갱更〉으로 두산아트센터 Space111 무대에 돌아왔다.
전작 《공동창작 실패 다큐멘터리: 생존자프로젝트는 생존할 수 있을까》에서 창작 과정의 처절한 실패와 갈등을 은폐하지 않고 무대 위로 직면시켰던 그가,
이번에는 만 39세라는 이른 나이에 맞닥뜨린 ‘조기 갱년기’라는 지극히 자전적인 신체적 상실의 경험을 서사적 출발점으로 삼았다.
‘고치다(경)’와 ‘다시(갱)’라는 이중적 의미를 지닌 한자어 ‘갱(更)’을 제목으로 내건 이 작품은, 재정난에 허덕이는 소규모 청년 창업 도시락 조리실을 배경으로 삼는다.
그곳은 지극히 평범하고 일상적인 노동의 공간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산업화 세대부터 베이비붐 세대, 밀레니얼 세대,
그리고 Z세대에 이르기까지 서로 다른 역사의 시간대를 통과해 온 여섯 인물이 좁은 주방 안에 밀려 들어와 생존을 다투는 뜨겁고 비장한 격전지다.
주인공인 영양사 ‘피영’은 조기 갱년기 진단을 받으며 몸의 변화와 정서적 불안을 겪고, 그녀가 운영하는 조리실은 밀린 임금과 자금난으로 휘청인다.
바로 그곳에 식칼 소리와 가스 불길, 끓는 기름 냄새 사이로 각 세대의 인물들이 품은 결핍과 상실이 적나라하게 부딪힌다.
본주 작가는 자본주의 사회가 개개인의 신체를 어떻게 소모하고 소비하는지, 그리고 우리는 타인의 상흔과 지나온 시대의 무게를 어떻게 ‘소화’하고 살아내야 하는지를 오컬트가 가미된 감각적인 무대로 구현해냈다.
자본 앞에서 우리는 과연 얼마나 도덕적일 수 있을까?
연극 〈갱更〉의 서사적 균열은 수십 년 전 가족을 버리고 떠났던 80대 할아버지 ‘천태’가 도축 공장에서 노동하다
한쪽 팔을 잃고 받은 산재 보상금 1억 3천만 원 통장을 들고 조리실을 찾아오면서 극도로 치달아 오른다.
신체 일부분을 상실한 대가로 얻어낸 이 붉은 통장은 조리실 인물들의 욕망과 도덕성을 시험대에 올리는 결정적인 상징물이다.
가족을 버렸다는 죄책감과 늙고 병든 신체만을 남긴 천태에게 그 1억 3천만 원은 자식과 손주 앞에서 부모 노릇을 할 수 있는 유일한 면죄부이자 권력이다.
“부모가 입히고 먹이고 살리는 게 다 돈이다. 돈 없으면 부모 노릇도 못 하고 굶어 죽는다”라며 통장을 던져놓는 천태의 모습은 자본이 곧 인간성과 부모 됨의 자격을 대변하는 잔혹한 현실을 투영한다.
자본 앞에서의 선택에 직면했을 때 인간은 과연 어디까지 도덕적일 수 있을까.
돈이 곧 '좋은 부모'이자 '좋은 사람'의 자격을 증명하는 현실은, 부유함으로서의 '잘사는 것'과 인간다움을 지키며 ‘올바르게 사는 것’의 경계를 어디에 두고 살아가야 할까.
그 경계는 얼마나 명확한가 혹은 모호한가.
오늘날 우리 사회는 은연중에 자본의 유무로 인간의 가치와 성품을 평가하곤 한다.
넉넉한 부모는 '좋은 부모'가 되고, 경제적 여유가 있는 사람은 '여유롭고 선한 사람'으로 포장되는 반면, 빈곤은 개인의 무능이자 윤리적 결함으로 치부된다.
천태가 들고 온 1억 3천만 원은 세대 간의 정서적 화해를 위한 매개체가 아니라,
자본 없이는 그 어떤 인간적인 관계나 책임도 성립하기 힘들어진 자본주의 사회의 비참한 초상을 증명하는 거울이다.
"염치 챙기면 굶어 죽는다"
천태의 산재 보상금을 대하는 인물들의 태도는 생존과 인간 존엄 사이에서 벌어지는 균열들을 보여준다.
피영의 엄마인 ‘금옥’은 수십 년 만에 나타난 아버지의 돈 앞에서 “염치 챙기면 굶어 죽는 거야”라는 일갈을 내뱉으며 그 돈을 거머쥔다.
빚에 쪼들려 조리실 문을 닫을 위기에 처한 피영 역시 과거의 상처와 부모에 대한 분노 속에서도 당장의 생존 앞에서 그 돈을 단칼에 거절하지 못하고 거친 괴로움에 빠져든다.
굶어 죽지 않기 위해 염치를 내려놓아야 하는 세상에서, 사회적 체면과 염치를 지키는 인간다움과 어떻게든 살아남아 버텨내는 생존의 본능은 끊임없이 마찰한다.
청년 세대(MZ·Z세대) 노동자인 ‘바리’와 ‘도로시’는 계약직과 알바, 실업급여를 오가며 최소한의 존엄과 정당한 대가를 요구하지만,
기성세대의 눈에는 그저 '배부른 소리'나 '염치없는 불평'으로 비친다. 반대로 산업화 세대와 베이비붐 세대는 살아남기 위해 자존심과 염치를 버리는 것을 당연시 해 왔다.
극 중 바리가 내뱉는 “도와준다는 게 나를 기분 나쁘게 할 수 있다”는 대사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기성세대가 시혜적으로 건네는 '도움'이나 '돈'은 때로 청년 세대의 존엄을 짓밟는 폭력이 되기도 한다.
굶어 죽지 않기 위해 염치를 버려야 하는 삶과, 인간으로서의 체면과 존엄을 지키려다 생계의 낭떠러지로 몰리는 현실 사이에서 연극 〈갱更〉은 어느 한쪽의 손을 들어주지 않는다.
대신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톱니바퀴 속에서 서로를 도우려 할수록 도리어 상처를 주고 어긋나는 생존 현장의 잔혹한 딜레마를 정면으로 응시한다.
지워지는 상흔과 소모되는 신체
연극 〈갱更〉은 이러한 사회적 메시지를 관념적인 대사에만 머물게 하지 않고, 무대 위 시각적·청각적·의상적 연출을 통해 가시화한다.
무대 중앙을 묵직하게 차지한 대형 스테인리스 조리대는 한국의 압축성장을 가능하게 했던 철강 산업의 결실이자 현실적인 일상의 소품이다.
그러나 스테인리스는 아무리 피와 기름때가 묻어도 걸레질 한 번이면 흔적도 없이 매끈하게 지워지는 성질을 가졌다.
이는 80대 천태처럼 한 시대를 몸 바쳐 일군 노동자들의 땀과 피, 산재의 상흔을 지워버리고, 소모된 신체를 외면하는 현대 사회의 매정한 속성을 대변한다.
또한 가장 특징적인 것은 무대 위에서 진짜 식재료(고기와 채소)를 눈에 보이지 않는 마임(Mime) 연기로 감추어버렸다는 것이다.
썩어 없어지지 않는 차가운 스테인리스 조리대는 선명히 보여주면서, 정작 썩어 없어질 식재료와 인간의 육신은 비시각화한 것이다.
여기에 배우들이 흰 조리복 위에 투명 비닐을 덧대어 마치 ‘마트 신선식품 코너의 랩 포장된 가공육’을 연상시키는 의상을 입고 나오는 장면은 섬뜩한 시각적 충격을 준다.
식재료를 가공하던 노동자가 도리어 자본의 시스템 안에서 상품화되고 가공되어 소비되는 현실을 직관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나아가 조리실의 일상적인 소음들은 오컬트적 사운드로 변이된다. 배경의 산업용 환풍기 소리는 갱년기를 겪는 피영의 거친 '숨소리'로 증폭되고,
믹서기 갈리는 소리는 천태의 과거 기억 속 도축장의 '띠톱' 소리로 변하여 관객의 심리를 뒤흔든다.
관객들이 무대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는 ‘양면형 객석’ 배치 역시, 내가 배우의 앞모습을 볼 때 반대편 관객은 뒷모습을 보게 만듦으로써
"우리는 타인의 한 단면밖에 볼 수 없다"는 소통의 한계를 물리적으로 체감하게 한다.
추한 단면을 ‘인정’하는 용기
피영은 거친 노동 현장과 부모 세대가 남긴 아픈 유산 앞에서 끊임없이 구역질을 한다. 이 구역질은 단순한 갱년기 신체 증상을 넘어,
“돼지는 자꾸 아픈 자기 첫 새끼를 뜯어먹고 영양분으로 삼는다”는 천태의 말처럼,
앞선 세대의 상처와 돈, 그리고 잔혹한 생존의 조건들을 차마 소화하지 못하고 쏟아내는 몸의 거부 반응이다.
그러나 극 후반부, 피영이 조리대 위를 집착적으로 문지르던 걸레질을 멈추고 마침내 구역질을 삼키기로 결심하는 순간이 찾아온다.
여기서 ‘삼킨다’는 행위는 현실에 대한 굴복이나 포기가 아니다.
내가 속한 시대의 비루함, 앞선 세대가 남긴 부끄러운 얼룩, 그리고 나 자신의 쇠락하고 추한 단면까지도 더 이상 외면하거나 도망치지 않고 내 몸 안으로 받아들여 기꺼이 책임지겠다는 결단이다.
본주 작가는 인터뷰를 통해 "전에는 바르고 어진 사람이 어른인 줄 알았지만, 이번 작업을 통해 부끄럽고 추한 것도 삼키고 스스로 추해지더라도 안고 책임지는 것이 진짜 어른임을 깨달았다"고 밝혔다.
그가 밝힌 어른의 자격은 '바름'을 지켜내는 데 있지 않다. 오히려 부끄럽고 추한 것을 삼키고 안는 데 있다.
우리는 흔히 이기심을 감추려 위선적인 도덕의 가면을 쓰곤 하지만, 내 안의 부조리함과 실수를 솔직하게 인정하는 용기야말로 참된 성숙의 자격이 된다.
나 자신의 허물을 인정할 때 비로소 타인의 상처와 타락 역시 위선 없이 안아줄 수 있기 때문이다.
매끄럽지 않은 궤도를 직면할 때, 비로소 시작되는 또 다른 '갱(更)'
연극 〈갱更〉은 관객을 향해 손쉬운 해답이나 도덕적 당위성을 제안하지 않는다.
무대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은 양면형 객석에서조차, 관객들은 타인의 불완전한 단면만을 목격하며 자신 역시 자본과 세대의 사슬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함을 깨닫게 된다.
그러나 이 연극이 마지막에 도달하는 지점은 뜻밖에도 다정한 수용과 위로다.
본주 작가는 불완전하고 부끄러운 우리의 삶을 섣부르게 포장하거나 외면하지 않은 채, 있는 그대로 껴안아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 삶의 궤도가 예상치 않게 흘러가더라도, 또 마주한 그 단면들이 딱히 아름답지 못하더라도 정말 괜찮다”며 말이다.
우리가 매끄럽지 않은 삶의 궤도를 굳이 정면으로 직면해야 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세상이 요구하는 완벽함이라는 환상에 맞춰 스스로를 속이고 감추려 할수록, 우리는 내 안의 상처는 물론 타인의 비루함과 아픔조차 견디지 못하고 도망치게 되기 때문이다.
내 삶의 울퉁불퉁하고 추한 단면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용기를 낼 때, 비로소 우리는 타인의 한계와 슬픔에 위선 없이 손을 내밀 수 있고, 구역질 나는 현실을 피하지 않고 삼켜내는 ‘진짜 어른의 책임감’을 얻게 된다.
자신의 몸을 갈아 넣으며 오늘 하루를 살아내는 우리 모두에게 연극은 다음과 같이 말하는 듯하다.
비록 우리의 삶이 찌질하고 추할지라도, 또 세상이 요구하는 매끈하고 완벽한 기준에 미치지 못할지라도,
그 울퉁불퉁하고 상처 입은 궤적을 피하지 않고 직면하는 것 자체가 이미 살아있음의 증거이자 가장 숭고한 생존의 모습이라고.
그리고 그 부끄러운 단면까지 기꺼이 껴안고 책임질 때, 비로소 우리 삶의 진짜 '갱(更)'이 시작된다고.
공연사진 ⓒ 두산아트센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