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와 《Doubt: A Parable》의 인연이 그러하듯, 나와 이 작품의 인연 역시 꼭 2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내가 Doubt를 처음 본 것은 2006년 로스앤젤레스에서였다. 브로드웨이에서 역사적인 14개월의 장기 공연을 마치고 퓰리처상과 토니상 최우수 연극상을 모두 거머쥔 뒤, 미국 전국 투어의 첫 무대에 오른 공연이었다. 당시 나는 연극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었지만, 철권통치의 교장 수녀 알로이시우스를 연기한 체리 존스의 맹렬한 연기와 존 패트릭 섄리의 글 속에 촘촘히 얽힌 감정의 복잡함에 완전히 압도되었다.
같은 해 빈 잉글리시 시어터에서 유럽 초연이 열렸고, 시드니 시어터 컴퍼니에서는 호주 초연이 막을 올렸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한창이던 1964년, 변화의 한복판에 놓인 시대를 배경으로 섄리의 걸작은 펼쳐진다. 배우들이 마음껏 파고들 수 있을 만큼 풍부하고 입체적인 인물들을 만들어낸 덕분에, 이후 세계 곳곳에서 수많은 프로덕션이 이 작품을 무대에 올렸다. 그러나 몇 년 전 가장 최근의 브로드웨이 리바이벌을 보았을 때는 그 마법이 이미 사라진 듯했다. 세월의 흔적이 역력했던 그 뉴욕 무대가 도덕적 확신을 이야기하든 철학적 모호함을 이야기하든, 어느 쪽도 내게는 더 이상 설득력 있게 다가오지 않았다.
그러던 중 뜻밖의 반전이 찾아왔다. 2006년 초연 이후 호주에서 처음 선보이는 대형 프로덕션에서, 베테랑 연출가 매리언 포츠와 창작진은 이 작품에 대한 나의 믿음을 완전히 되살려 놓았다. 어쩌면 지금까지 무대에 오른 《Doubt》 가운데 최고의 프로덕션이라 해도 좋을 만큼 뛰어난 공연이었다. 포츠는 다른 프로덕션들이 미처 발견하지 못했거나 의도적으로 지나쳤던 섬세한 디테일을 끌어내 새로운 해석을 제시하면서도, 놀랍게도 작품의 본질을 다시 선명하게 드러낸다.
《Doubt》를 무대화할 때 가장 큰 어려움 중 하나는 작품이 특정 시대와 장소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배경의 제약을 생각하면 디자이너들의 선택지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수녀복과 사제복만으로 과연 얼마나 새로운 것을 보여줄 수 있겠는가? 그 때문에 지금까지 이 작품의 무대는 시각적으로 다소 예측 가능한 모습에 머물러 온 것이 사실이다.
포츠는 자신의 비전을 세계적인 디자이너 밥 커즌스에게 맡겼다. 거대한 프란시스코 데 수르바란의 Agnus Dei 복제화 아래에서 플린 신부가 의심에 관한 설교를 하는 첫 장면부터 압도적이다. 막이 오르면 옅은 파스텔 블루가 살짝 감도는 흰색의 정육면체형 구조물이 모습을 드러내고, 그 위에는 은총의 성모상이 자리한다. 세인트 니콜라스 교회 학교 앞에 듬성듬성 서 있는 짙은 갈색의 앙상한 나무들은 이 구조물을 더욱 선명하게 부각시키며, 1960년대 브롱크스의 흑백 스카이라인을 배경으로 아름다운 대비를 이룬다.
넓고 밝은 공간임에도 삭막한 냉기와 좀처럼 가시지 않는 폐쇄감이 감돈다. 대형 회전무대는 실내와 실외 장면을 매끄러우면서도 극적으로 전환시키며, 모든 것이 훤히 드러나 있는데도 공간 전체는 철저히 고립된 듯한 인상을 준다. 이 강렬한 시각적 분위기에 제시카 던의 음향 디자인이 기묘할 만큼 평온한 정서를 더한다. 낮게 울리는 찬송가와 멀리서 들려오는 아이들의 놀이 소리, 교회 종소리, 그리고 배우들의 아카펠라가 어우러진다. 이 정교한 사운드는 절제되어 사용되지만, 그 여운은 강렬하다.
전통적인 무게감을 걷어낸 뜻밖의 미학이며, 극이 전개되는 동안 감정 역시 혼란스럽게 흘러가지 않는다. 포츠는 네 명의 강렬한 배우를 통해 인간의 복잡하고 쉽게 파악할 수 없는 면모를 드러내는 한편, 몇 가지 파격적인 해석을 더한다. 특히 플린 신부가 첫 등장부터 이토록 뚜렷하게 취약한 모습을 보이는 경우는 좀처럼 찾아보기 어렵다.
이 역할은 원래 샘 워싱턴이 맡을 예정이었다. 2021년 브랜든 제이콥스-젠킨스의 Appropriate 호주 초연으로 20여 년 만에 무대에 복귀한 데 이어 선보일 차기작이었다. 하지만 워싱턴의 하차는 오히려 뜻밖의 행운이었는지도 모른다. 대신 플린 신부를 맡은 샘 리드는 젊은 조엘 오스틴을 연상시키는 강한 매력과 친근함을 자연스럽게 발산한다. 꾸밈없이 드러나는 그의 감정은 처음부터 플린에게 더욱 호감을 갖게 하는 동시에, 그를 둘러싼 의심을 오히려 더욱 짙게 만든다.
리드가 그려내는 섬세한 플린의 모습에 점차 마음을 열게 되지만, 그가 시스터 제임스의 마음을 사로잡고 수첩에 무언가를 적어 내려가는 순간에는 어딘가 석연치 않은 기색이 스친다. 물론 그것 역시 단순히 그의 타고난 성향일지 모른다. 그는 변화의 시기를 맞은 가톨릭교회에 꼭 필요한 선구적인 인물일까? 그의 섬세함은 진짜 그의 본모습인 동시에, 다른 이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연출된 모습이기도 한 걸까? 이처럼 상반된 가능성을 끝까지 열어두는 리드의 복합적인 연기는 흠잡을 데 없다.
플린 신부가 “얼음덩어리”라고 부르는 알로이시우스 수녀는 파멜라 라베의 치밀한 역할 분석을 통해 섬세하면서도 생생한 인물로 되살아난다. 라베는 알로이시우스의 말투에 은은한 유럽식 억양을 더해, 이 인물에게 흔히 덧씌워지는 차갑고 완고한 이미지를 절묘하게 깨뜨린다. 그녀는 자신만의 역사와 이야기를 지닌 한 명의 살아 있는 여성이다. “히틀러와의 전쟁”에서 남편을 잃었다고 말하며, 그가 전선에 나가 있는 동안 라디오 뉴스를 빠짐없이 들었다고 회상하는 대목은 이제 이전보다 훨씬 풍부한 의미로 다가오며, 알로이시우스라는 인물을 더욱 흥미롭게 만든다.
라베가 그려내는 알로이시우스는 수녀복을 입은 냉혹한 권위자가 아니다. 격변하는 시대와 차마 말로 표현하기 힘든 과거를 모두 겪고도 살아남은 여성이다. 그녀에게 질서는 살아남기 위한 방식이며, 자비는 오직 신에게서만 온다. 극 중 몇 차례 알로이시우스가 창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는 순간이 포착되는데, 이는 데이미언 쿠퍼의 조명이 만들어내는 또 하나의 인상적인 장면이다. 극 내내 알로이시우스는 확신을 추구하지만, 과연 그녀가 그 확신을 단 한 순간이라도 진정으로 가져본 적이 있었을까?
라베는 끊임없이 위압적인 태도를 밀어붙이는 대신, 시스터 제임스와 나누는 세대 차이가 묻어나는 대화에 적절한 유머를 녹여낸다. 굳이 한 가지 아쉬움을 꼽자면, 알로이시우스를 이전보다 다소 부드럽고 속내가 드러나는 인물로 그려낸 선택이 마지막 장면이 주는 섬뜩함을 다소 약화시켰을 수도 있다는 점이다.
뮤지컬 무대에서 경력을 쌓아온 젊은 중국계 호주 배우 샤넨 앨리스 콴의 연기는 뜻밖의 즐거움을 안긴다. 콴은 역할에 필요한 순수하고 해맑은 면모를 잃지 않으면서도 시스터 제임스에게 단단한 중심을 부여한다. 알로이시우스 수녀가 대변하는 낡은 세계와 플린 신부가 제시하는 변화하는 도덕적 가치관 사이에서 관객의 시선을 대신하듯, 그녀는 자신 앞에 놓인 갈등을 피하지 않고 당당히 마주한다.
이 네 인물의 균형을 완성하는 것은 진지 오켄요가 연기하는 뮬러 부인이다. 담배를 손에 든 채 학교로 향하는 그녀의 모습에서는 마치 세상의 무게를 홀로 짊어진 듯한 피로감이 느껴진다. 라베와 마찬가지로 오켄요 역시 자신의 인물에 여러 겹의 깊이를 더한다. 가장 단정한 일요일 외출복을 갖춰 입었지만, 몸에 꼭 맞는 트위드 스커트 수트 안에서도 결코 편안해 보이지 않는 태도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오켄요가 그려내는 어머니의 모습은 불안이나 절박함,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세상의 불공평함을 냉정할 만큼 분명하게 인식하고 받아들이는 데서 나온다.
알로이시우스 수녀가 “대체 어떤 어머니가 이래요?”라고 외치는 순간은 보통이라면 관객의 마음이 교장 수녀 쪽으로 기울 법한 장면이다. 그러나 이번 공연은 오히려 우리에게 어머니의 사랑이란 과연 무엇인지 훨씬 더 깊이 생각하게 만든다.
라베가 마지막 고백에서 더 이상 빈틈없이 자신을 방어하지 않으면서, 작품의 결말은 차갑고 충격적인 절정과는 다른 방향으로 나아간다. 연극은 본질적으로 질문을 불러일으키는 공간이지만, 이번 공연에서 중요한 것은 어느 편에 설 것인지, 혹은 누구를 믿을 것인지가 아니다. 대신 우리는 결함을 지닌 네 인물 모두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다. 결국 이들을, 그리고 우리를 하나로 묶는 것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지닌 나약함이다. 포츠는 확신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그리고 결정적인 증거에 끝내 닿을 수 없을 때 우리 모두가 살아가야 하는 불확실한 영역을 오랫동안 여운이 남을 만큼 깊이 있게 탐구한다.
공연 사진 ©Prudence Upt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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