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이트 래빗 레드 래빗(White Rabbit Red Rabbit)에서 내 눈길을 가장 사로잡은 건 독특한 설정이었다. 배우가 공연 당일까지 대본을 전혀 보지 못한 채 무대에 오르고, 막이 오른 뒤에야 처음으로 대본을 받아 읽는다는 것. 과연 어떤 무대가 펼쳐질지 호기심을 가득 안고 극장을 찾았다.
무대에는 책상 하나, 의자 하나, 그리고 사다리 하나만 놓여 있었다.
화려한 무대장치도 없는 그 고요한 공간에, 배우는 작은 약병 하나를 든 채 나타났고 그 순간 공연의 막이 올랐다. 배우는 생전 처음 마주하는 대본을 읽어가면서도, 자신만의 해석과 생각을 자연스럽게 녹여내며 극을 이끌어갔다.
공연을 보는 내내 이 작품이 얼마나 철저하게 ‘배우의 역량’에 기대고 있는지 실감할 수 있었다. 리허설도 없이 온전히 한 시간 동안 무대를 책임져야 하기에 순간적인 판단력과 표현력이 끊임없이 요구되었고, 배우가 가진 집중력과 순발력이 그대로 드러나는 듯했다.
여기에 ‘관객 참여’는 극을 완성하는 결정적인 열쇠였다. 배우는 관객을 무대로 불러내 곰이나 토끼 역할을 맡겼고, 때로는 객석 전체가 한목소리로 숫자를 외치게 만들기도 했다. 관객들이 던지는 반응 하나하나에 따라 공연의 공기와 흐름이 시시각각 변하는 과정이 무척 신선했다.
특히 내가 관람한 회차에서는 잊지 못할 돌발 상황이 있었다. 한 관객이 미리 ChatGPT로 작품 내용을 찾아보고는, 장난스레 자신의 번호가 아닌 다른 숫자를 외친 것이다. 하지만 이런 예상치 못한 틈입조차 극의 몰입을 방해하기는커녕, 오히려 현장감을 극대화하며 더욱 유쾌하고 특별한 분위기를 만들어주었다.
작가 역시 대본을 통해 배우와 관객에게 끊임없이 직접 말을 건넸다. 자신의 생각과 집필 당시의 상황을 눈앞에서 조근조근 이야기하듯 전달하는 구성이 참 독특했다. 보통의 연극이 수없이 연습한 완벽한 합을 보여주는 곳이라면, 이 작품은 배우가 처음 만난 텍스트를 매개로 작가, 그리고 관객과 실시간으로 주파수를 맞추며 무대를 완성해 나가는 매력이 있었다.
가장 숨 막혔던 순간은 단연 마지막 장면이었다. 극 중 배우는 진짜 약이 든 물과 아무것도 들지 않은 물 중 하나를 선택해 마셔야 하는 순간에 놓인다. 배우가 무대에 누워 깊은 고민에 빠져 있는 동안, 나 역시 숨을 죽인 채 그의 선택을 기다렸다.
이날 무대에 선 배우 오정택은 누구도 예상치 못한 선택을 내렸다. 약이 든 물과 맹물을 서로 섞어서 마셔버린 것이다. 같은 대본일지라도 배우가 어떤 결정을 내리느냐에 따라 공연의 무드와 메시지가 완전히 달라질 수 있음을 온몸으로 체감한 순간이었다.
공연이 막을 내린 뒤에는 관객과의 대화 시간이 이어졌다. 대본을 처음 받아 들었을 때의 떨림, 무대 위에서 느낀 감정들을 배우의 목소리로 직접 들으니 작품이 한층 더 깊이 다가왔다. 마지막에 마신 물의 실제 맛은 어땠는지 솔직하고 유쾌한 비하인드까지 들을 수 있어 무척 친근한 시간이었다.
화이트 래빗 레드 래빗은 배우와 관객이 함께 호흡하며 빚어내는 단 하나의 특별한 무대였다. 참여하는 이들에 따라 매번 새로운 이야기가 쓰이고, 같은 배우라 할지라도 회차마다 전혀 다른 해석이 탄생한다. 정해진 정답을 보여주는 극이 아니라, 같은 시공간 속에서 함께 길을 찾아가는 연극. 오직 라이브 공연만이 줄 수 있는 예측 불가능한 매력과 단 한 번뿐인 순간의 소중함을 일깨워준,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작품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