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한국에서의 내한 및 라이선스 공연에 이어, 2026년 뒤셀도르프 캐피톨 극장(Capitol Theater)에서 영국 투어 프로덕션의 뮤지컬 <식스(SIX)>를 다시 마주했다.
튜더 왕조 헨리 8세의 여섯 부인들의 이야기를 80분간의 팝 콘서트 배틀로 풀어낸 이 작품은 세계적인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다.
역사학을 일상의 영역으로 확장하는 '퍼블릭 히스토리(Public History)'를 연구하는 학도의 입장에서, 이 작품은 역사를 대중화하고 재현(Representation)하는 방식에 관한 가장 영리한 선례다.
이번 관람은 특별한 동행과 함께였다. 뼛속까지 '이과'인 동행은 10학년 때 이 뮤지컬을 접한 후 영국 역사에 푹 빠졌고,
급기야 독일의 졸업 시험인 아비투어(Abitur)에서 이 작품을 주제로 영어 소논문을 썼다.
역사에 관심 없던 학생이 대중문화를 통해 스스로 역사를 탐구하고 학업과 연결하게 된 것, 이것이 바로 퍼블릭 히스토리가 지향하는 가장 강력하고 긍정적인 순간이다.
퍼블릭 히스토리의 핵심은 학술적인 영역에 갇힌 역사를 대중이 쉽게 접근하고 주체적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만드는
이른바 '역사적 권위의 공유(shared historical authority)'에 있다.
동행의 친구의 사례는 이 뮤지컬이 지닌 퍼블릭 히스토리적 가치를 증명한다.
His-story에서 Her-story로: 거대 서사(Master Narrative)의 전복과 주체성 회복
1970년대 이후 역사학계는 권력을 가진 영웅 중심의 '거대 서사(Master Narrative)'에서 벗어나 여성, 소수자 등 배제되었던 이들의 목소리인 '아래로부터의 역사'에 주목해 왔다.
<식스>는 바로 이 지점을 무대 위로 끌어올린다.
헨리 8세라는 절대 권력자의 역사(His-story)를 지우고, 단지 '아내 1, 2, 3'으로 요약되던 여섯 왕비에게 직접 마이크를 쥐여주며 그들만의 서사(Her-story)를 복원한다.
"이혼당하고, 참수당하고, 죽고, 이혼당하고, 참수당하고, 살아남았다(Divorced, beheaded, died, divorced, beheaded, survived)"는
500년 전의 비극은 21세기의 걸파워 찬가로 리믹스(remix)된다. 권력에 의해 지워진 자들에게 주체성을 부여하고 정체성을 회복하게 하는 사례다.
무대화의 윤리와 기준: 비극을 팝 음악으로 승화시키다
그렇다면 "참수"와 "죽음" 같은 비극적 역사를 이토록 신나는 팝 콘서트로 무대화해도 되는가? 역
사를 흥미 위주로 소비할 위험성은 퍼블릭 히스토리 기획자들이 늘 경계해야 할 윤리적 딜레마다.
하지만 <식스>가 윤리적 선을 넘지 않고 오히려 독일 현지 dpa 통신으로부터 "여성들의 강인함을 축하하는 데 성공한 페미니스트 불꽃놀이"라는 극찬을 받은 이유가 있다.
비극을 대상화하거나 자극적으로 전시하는 대신, 비욘세, 아델, 아리아나 그란데 등 현대 팝 아이콘에서 영감을 받은 캐릭터들을 통해
희생자들이 스스로 억압을 깨고 나오는 '엠파워먼트(Empowerment)'의 서사로 치환했기 때문이다.
폭력의 주체인 권력자를 서사에서 철저히 배제하고 피해 여성들의 목소리를 중심에 두는 시선의 이동이야말로,
무대화할 수 있는 역사와 그렇지 않은 역사를 가르는 훌륭한 윤리적 기준점이 된다.
남들이 잘 보지 않는 변두리의 시선으로 주류 역사를 재구성하는 것은 늘 새로우면서도 역사적 맹점(Blind spot)을 보완하는 의미 있는 작업이다.
역사의 무대화
이러한 '히스토리 리믹스'가 퍼블릭 히스토리에 미치는 궁극적인 긍정적 영향은 다시 ‘아비투어 에피소드’로 돌아간다.
극의 팝스타 모티브와 80분간의 쇼는 젊은 세대와 연극 초심자(Theater-Newbies)들을 극장으로 끌어들인다.
관객들은 스포티파이와 틱톡에서 글로벌 팬들과 사운드트랙을 재생산하며 스스로 영국 튜더 왕조를 학습한다.
현지 매체 바이에른 방송(Bayerischer Rundfunk)은 이를 "역사와 해방에 관한 춤출 수 있는 이중 수업"이라 평했고,
남독일신문(Süddeutsche Zeitung)은 "모든 역사책이 뮤지컬 같다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찬사를 보냈다.
가장 무거운 역사를 가장 트렌디한 팝 뮤직의 문법으로 풀어내어, 역사에 관심 없던 이과생마저 스스로 역사 속으로 걸어 들어오게 만든 똑똑한 기획의 승리다.
역사, 그리고 LIVE!
뮤지컬 <식스>는 퍼블릭 히스토리안에게 매우 중요한 사실 하나를 일깨워 준다.
바로 역사는 고정불변의 절대적 진리가 아니라, 후대 사람들의 해석과 시대적 맥락에 의해 끊임없이 재구성되는 '구축물(Construct)'이라는 점이다.
대중에게 제시되는 역사는 결코 닿을 수 없는 과거 그 자체가 아니라 '해석된 역사'다. <식스>는 이를 감추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역사를 엄숙한 교과서의 형태가 아닌 '팝 콘서트'라는 파격적인 형식으로 제시함으로써,
창작자가 과거의 텍스트를 현대적 관점에서 어떻게 변형하고 '리믹스(Remix)'했는지를 관객 앞에 투명하게 드러낸다.
더 나아가 이 작품은 '발생적 스토리텔링(Genetic Storytelling)'의 훌륭한 예시라고도 할 수 있다.
발생적 스토리텔링이란 과거를 맹목적으로 추종하거나(전통적 서사) 단순히 도덕적 교훈의 도구로만 삼는 것(모범적 서사)을 넘어,
과거와 현재의 차이를 날카롭게 인식하면서도 두 시대의 규범을 조화롭게 융합하여 새로운 현재적 가치를 창출해 내는 방식이다.
여섯 여왕은 16세기의 비극이라는 '과거의 사실'에 기반을 두면서도, 이를 21세기의 '걸파워'와 '엠파워먼트'라는 '현재의 규범'으로 새롭게 엮어내어 현대 관객들에게 강력한 오리엔테이션(방향성)을 제공한다.
퍼블릭 히스토리 연구자 마르코 데만토프스키(Marko Demantowsky)는
훌륭한 퍼블릭 히스토리의 핵심 기준으로 '개인에게 다양한 재배향(Reorientation)의 가능성을 열어주고, 민주적 다원주의를 수호하는 것'을 꼽았다.
권력을 쥔 한 명의 남성(헨리 8세)이 독점하던 거대 서사를 해체하고, 배제되었던 여섯 여성 각자의 다원화된 목소리와 정체성을 무대 위에 병렬적으로 복원한 <식스>는 다원주의적 역사 서술이 지닌 힘을 증명한다.
결국 뮤지컬 <식스>는 지나간 과거를 박물관의 유리관 안에 단순히 박제해 두지 않는다.
무대 위 여섯 여왕들은 특정 인물의 아내라는 종속된 꼬리표를 떼어내고, 그 자체로 기억될 권리를 쟁취했다.
퍼블릭 히스토리안의 시각에서 이 작품은 우리가 역사를 어떻게 대중화하고, 누구의 시선으로 재현하며, 어떤 방식으로 현재와 소통하게 할 것인가에 대한 대답이다.
작품의 캐치프레이즈인 "Divorced, Beheaded, LIVE!"가 선언하듯,
역사는 죽어있는 텍스트가 아니라 대중과 호흡하며 끊임없이 리믹스되는 현재 진행형의 '라이브(LIVE)'인 것이다.
공연 사진 ⓒ Pamela Raith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