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THE WASP>는 영국 런던에서 큰 호평을 받아 미국, 호주, 그리고 26년 3-4월 한국에서 초연된 작품이다. 흔치 않은 여성 2인극이자, 탄탄한 스토리라인과 복선, 반전 그리고 깊이 생각할 '폭력'이라는 주제도 다루고 있는 극이다. 주로 폭력의 대상 비춰지던 여성을 폭력의 주체 다룬다는 점과 제목의 말벌과 주제의 연관성에 대한 궁금증에 관람하게 되었다.
장막이 걷히며 서서히 드러나는 내막
어느 한 카페에 어색하게 마주보고 앉아있는 카알라와 헤더. 두 사람은 학교 졸업 이후, 서로를 만난 적이 없다. 게다가, 카알라는 학창시절 내내 헤더를 지독하게 괴롭힌 인물이다. 그럼에도 헤더는 자신의 남편 사이먼의 외도에 대해 이야기하며, 카알라에게 사이먼을 죽이면 막대한 돈을 주겠다는 제안을 한다. 헤더와 달리 가난한 데다 아이까지 임신 중인 카알라는 헤더의 제안을 거절하지 못하고 받아들인다. 극의 초반, 무대는 도시의 소음과 함께 긴 커튼과 테이블, 의자로 단순히 구성되어 있다. 등받이가 있는 의자에 편안히 앉아 헤더의 이야기를 듣는 카알라와 꼿꼿한 자세로 의자에 앉아 남편의 바람과 자신의 처지에 대해 말하는 헤더. 두 사람의 차이는 이 단순한 구성에서부터 드러난다. 또한, 헤더가 자신이 당했던 폭력의 기억을 이야기해도, 가해자인 카알라는 기억조차 하지 못하고 대충 넘어가려는 태도에 계속 어긋나는 대화에서도 이를 짐작할 수 있다.
이후, 헤더의 남편을 살해할 계획을 세우기 위해 카알라는 헤더의 집을 찾아간다. 무대의 장막이 걷히며, 헤더의 부유해 보이는 집이 드러난다. 남 부럽지 않은 아름다운 집에 살고 있는 헤더의 모습만을 보면, 그녀의 과거가 학교 폭력에 불우했다는 것을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헤더의 복수가 시작되며 한 겹 더 걷힌 장막 뒤 공간은 폭력 속 헤더의 끔찍한 시간을 압축해 나타난다. 자신이 카알라에게 당한 일들에 울분을 토해내는 헤더의 대사와 폭력이 공간을 통해 형상화되며 상상하기 힘든 고통의 내면을 보여주는 것이다.
말벌과 타란툴라, '폭력'이라는 악순환의 고리
헤더의 집에는 타란툴라 사냥벌의 박제가 전시되어 있다. 타란툴라 사냥벌은 타란툴라 거미의 몸에 알을 낳고, 태어난 애벌레는 타란툴라 몸 속에서 양분을 빼먹고 성에로 자라난다. 그리고 말벌이 타란툴라를 떠나는 순간 거미는 죽음에 이른다. 말벌과 타란툴라의 관계는 헤더와 카알라의 관계를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하다. 극의 초반에는 헤더의 기억을 지배하고 있는 카알라가 타란툴라 사냥벌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헤더의 복수가 시작된 이상 누가 타란툴라 사냥벌이고, 누가 타란툴라 거미라고 단정지을 수 있을까.
"널 풀어주면서 동시에 두 가지 선택을 줬어. 선함이야 아니면 폭력이야?"
헤더의 회상 중 카알라도 아버지에 가정 폭력을 당하며,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언급한다. 그럴 때마다 헤더는 모른 척 카알라를 자신의 집으로 숨겨 주었다. 그러나 '선함'의 대가로 돌아온 결과는 '폭력'이었다. 카알라가 당했던 이 가정 폭력이 헤더에게 화살이 되어 학교 폭력으로, 결국은 현재 헤더의 복수로까지 이어진다. 극 내내 자신의 폭력에 반성하지 않는 카알라의 태도에 헤더의 복수가 정당해 보인다. 하지만, 헤더의 행동 또한 '폭력'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폭력은 폭력을 낳고, 이 폭력을 끊기 위해서는 또 다른 폭력만이 해답일 수 있을까. 우리 사회에 여전히 존재하는 폭력의 악순환을 우리는 어떻게 끊어내야 할까. 위와 같은 헤더의 질문에 우리는 '선함'을 택해야 하는 것을 당연히 알고 있다. 그러나 선함을 택했을 때 돌아오는 폭력이, 우리를 이 악순환에서 더욱 끊어내지 못하게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 악순환을 근절하기 위해 우리는 인간이라는 존재의 존중, 신뢰, 성찰과 같은 본질적인 가치들을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Production photos: heavenmania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