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몽유도원>에는 인상적인 장면들이 많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강렬하게 기억에 남는 순간을 꼽으라면 단연 여경과 도미의 바둑 대결 장면입니다. 이 장면은 단순히 두 인물이 승부를 겨루는 장면이 아닙니다. 사랑과 욕망, 운명과 집착이 맞부딪히는 순간을 무대 언어로 압축해 보여주는 장면이자, 작품의 미학이 가장 효과적으로 드러나는 장면이라고 생각합니다.
작품 속에서 백제의 왕 여경은 오래전부터 꿈속에 나타나던 아랑을 잊지 못합니다. 그러나 아랑은 이미 도미와 혼인한 상태입니다. 그럼에도 여경은 아랑을 포기하지 못하고 신하 향실과 함께 계략을 꾸밉니다. 향실은 먼저 도미와 바둑을 두며 그의 수를 익히고, 이를 바탕으로 여경은 도미와의 대결에 나섭니다. 몇 차례 패배를 거듭한 뒤, 마지막 승부에서 여경은 도미의 패턴을 벗어난 수를 두며 결국 승리를 거머쥡니다. 그리고 그 대가로 아랑을 요구하게 됩니다.
이 장면의 흥미로운 점은 사실 승부 자체보다도 그 승부를 표현하는 방식에 있습니다. 무대 뒤편에서는 여경과 도미가 실제로 바둑을 두고 있지만,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는 것은 무대 전면을 가득 채운 앙상블 배우들의 움직임입니다. 처음 이 장면을 보았을 때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연출이 정말 대단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앙상블들은 흑과 백을 상징하는 의상을 입고 무대를 가로지르며 끊임없이 움직입니다. 서로 밀고 당기고, 얽히고 설키며 때로는 상대를 포위하고 때로는 빈틈을 파고드는 모습은 마치 실제 바둑판 위에서 움직이는 흑돌과 백돌을 보는 듯한 인상을 줍니다. 관객은 바둑판을 직접 볼 수 없지만, 배우들의 몸짓을 통해 현재 승부가 어떤 흐름으로 흘러가고 있는지를 직관적으로 이해하게 됩니다.
특히 인상 깊었던 부분은 안무의 역동성이었습니다. 2층 객석에서 관람했을 때는 군무의 전체적인 구성과 동선이 한눈에 들어와 감탄하게 되었고, 이후 1층 객석에서 다시 관람했을 때는 배우들의 에너지에 더욱 놀라게 되었습니다. 배우들은 쉴 틈 없이 움직이며 고난도의 안무와 아크로바틱한 동작을 소화해 냈습니다. 가까이에서 보니 땀을 흘리면서도 흐트러짐 없이 장면을 완성해 나가는 모습이 더욱 인상적이었습니다.
이 장면이 특별한 이유는 바둑이라는 정적인 소재를 극도로 역동적인 무대 언어로 번역해 냈기 때문입니다. 원래 바둑은 움직임이 크지 않은 게임입니다. 하지만 <몽유도원>은 그 보이지 않는 심리전과 전략을 앙상블들의 움직임으로 시각화하면서 무대 전체를 거대한 바둑판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덕분에 관객들은 단순히 두 인물의 대결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펼치는 치열한 심리전 속으로 자연스럽게 끌려 들어가게 됩니다.
의상 역시 눈여겨볼 만한 요소였습니다. 흑과 백이라는 대비되는 색상을 사용했지만, 완전히 분리된 형태가 아니라 하단으로 갈수록 자연스럽게 색이 섞이는 그라데이션이 적용되어 있었습니다. 이는 단순히 바둑의 흑돌과 백돌을 상징하는 것을 넘어 작품 속 인물들의 복합적인 감정을 보여주는 장치처럼 느껴졌습니다.
조명 또한 장면의 긴장감을 극대화하는 역할을 합니다. 배우들의 움직임에 따라 명암이 끊임없이 변화하며 마치 바둑판 위에서 세력이 확장되고 축소되는 과정을 보는 듯한 느낌을 줍니다. 여기에 점차 고조되는 음악은 승부의 긴장감을 더욱 끌어올리며 관객의 몰입도를 높입니다. 무대, 음악, 조명, 안무가 각각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장면을 위해 유기적으로 맞물려 돌아가는 것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공연이 끝난 뒤에도 이 장면이 오래 기억에 남는 이유는 단순히 멋있는 장면이어서가 아닙니다. 연출이 작품의 메시지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장면은 다시 생각할수록 새로운 해석이 가능한 장면처럼 느껴졌습니다. 오히려 연출 분석만 따로 해도 하나의 글이 나올 수 있을 정도로 완성도가 높았습니다.
또한 <몽유도원>이 더욱 특별하게 느껴졌던 이유는 삼국시대를 배경으로 한 창작 뮤지컬이라는 점입니다. 최근 공연계에서 쉽게 만날 수 없는 시대적 배경과 한국적인 정서가 작품 전반에 녹아 있었고, 음악 역시 높은 완성도를 보여주었습니다. 특히 도미의 솔로 넘버는 공연이 끝난 뒤에도 계속 생각날 정도로 인상적이었습니다.
만약 언젠가 <몽유도원>이 다시 무대에 오른다면 저는 망설임 없이 다시 관람할 것 같습니다. 명작은 시간이 지나도 다시 찾게 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리고 여경과 도미의 바둑 대결 장면은 그 이유를 가장 잘 보여주는 장면 중 하나였습니다. 보이지 않는 바둑판을 무대 위에 펼쳐낸 이 장면은 앞으로도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 같습니다.
유튜브 - 뮤지컬 몽유도원의 흑과 백 넘버 링크 공유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