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빌리 엘리어트>를 관람했다.
사실 <빌리 엘리어트>는 영화로도 정말 좋아하는 작품이라 익숙한 이야기였다. 그래서 오히려 기대와 걱정이 함께 있었다. 긴 러닝타임 동안 어린 주인공인 빌리가 극을 이끌어갈 수 있을지, 대극장 주연 배우들 못지않은 에너지와 존재감으로 관객을 사로잡을 수 있을지 궁금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런 걱정은 공연이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완전히 사라졌다.
무대 위에서 춤을 추는 빌리를 보는 순간부터 알 수 없는 감정에 휩싸였고, 공연 내내 정말 많은 눈물을 흘렸다.
공연이 끝난 뒤 문득 궁금해졌다. 왜 이렇게까지 많이 울었을까. 곰곰이 생각해 보니, 아마 빌리가 '발레'를 처음 만난 순간부터였던 것 같다.
원하지도 않던 복싱 수업에 끌려 다니던 아이가 우연히 들어간 발레 수업에서 자신만의 세계를 발견한다. 그리고 춤을 추고 싶다는 순수한 열정과, 그 열정을 뒷받침하는 재능이 무대 위에서 펼쳐질 때마다 이상하리만큼 가슴이 벅차올랐다.
어쩌면 나는 빌리가 춤을 잘 춰서가 아니라, 무언가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된 모습을 보며 감동받았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1막 마지막에 등장하는 'Angry Dance'는 그 감정을 가장 강렬하게 보여 주는 장면이었다.
자신의 꿈을 반대하는 아버지에 대한 분노,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하는 답답함, 춤을 포기할 수 없는 간절함을 온몸으로 쏟아내는 그 장면은 숨이 막힐 정도로 강렬했다. 7분이 넘는 시간 동안 이어지는 춤은 어떤 화려한 넘버보다도 압도적인 에너지를 품고 있었다.
특히 이날 빌리 역은 역대 최연소 빌리인 조윤우 배우였다.
작고 귀여운 얼굴을 한 아이가 어떻게 그렇게 폭발적인 감정과 에너지를 표현할 수 있는지 감탄을 넘어 존경스럽기까지 했다. 무대 위의 윤우 빌리는 더 이상 어린 배우가 아니라, 정말로 춤을 포기할 수 없는 빌리 그 자체처럼 보였다.
아버지에게 "엄마라면 허락했을 거예요!"라고 외치는 장면에서는 마음이 무너졌다. 저 어린 아이에게는 온전히 자신의 편이 되어 줄 사람이 꼭 필요할 텐데, 형과 아버지는 빌리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한다. 빌리가 외롭고 답답해 보일수록 나 역시 답답하고 화가 났다.
그런데 2막에 들어서면서 그 감정은 또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변해 가는 형과 아버지, 그리고 빌리의 꿈을 진심으로 응원하는 사람들을 보며 또 한 번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
'한 아이를 키우기 위해서는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을 참 좋아한다.
<빌리 엘리어트>는 그 말을 가장 아름답게 보여 주는 작품이었다. 발레가 무엇인지도 잘 모르지만 아들의 꿈을 위해 평생 지켜 온 신념마저 내려놓기로 결심하는 아버지. 파업으로 하루하루를 버티기조차 힘든 상황에서도 빌리가 오디션을 보러 갈 수 있도록 기꺼이 돈을 모아 주는 마을 사람들. 배신자라는 낙인이 찍혔어도 빌리의 꿈을 위해 거액의 돈을 내놓는 형의 친구. 그리고 무엇보다도 빌리의 재능을 가장 먼저 발견하고, 그 재능이 꽃필 수 있도록 끝까지 믿어 준 윌킨슨 선생님.
그 누구도 당연한 사람이 없었다. 빌리는 분명 재능 있는 아이였지만, 결국 그 재능을 지켜 준 것은 주변 사람들의 사랑과 믿음이었다. 누군가의 가능성을 믿어 주는 일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그리고 한 사람의 인생을 얼마나 크게 바꿀 수 있는지 새삼 느끼게 되었다.
한편으로는 빌리가 부럽기도 했다. 운명처럼 자신에게 다가온 춤이 있었고, 그것을 사랑할 수 있었으며, 그 안에서 자신의 재능을 발견할 수 있었다. 물론 빌리 역시 수많은 반대와 어려움을 겪었지만, 적어도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는 알고 있었다. 어린 나이에 자신이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을 발견한 사람.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빌리는 이미 특별한 사람처럼 느껴졌다.
개인적으로 영화 <빌리 엘리어트>의 마지막 장면을 정말 좋아한다.
형과 아버지가 객석에서 아들의 공연을 바라보고, 빌리는 <백조의 호수>의 주역 무용수가 되어 무대 위를 날아오른다. 그리고 그 모습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표정은 말로 설명하기 어려울 만큼 벅차고 감동적이다. 아마 아버지는 그 순간 하나만을 바라보며 살아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뮤지컬에는 같은 장면이 등장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인상적인 장면이 있었다.
바로 어린 빌리와 성인 빌리가 함께 춤을 추는 순간이다.
특히 이날 성인 빌리 역을 초연의 1대 빌리였던 임선우 발레리노가 맡았다는 사실은 그 장면을 더욱 특별하게 만들었다. 공연 내내 윤우 빌리가 극의 중심이었다면, 그 장면만큼은 선우 빌리의 인생 전체를 바라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어린 시절 무대 위에서 빌리를 연기했던 소년이 성장해 프로 무용수가 되었고, 다시 무대 위에 올라 어린 빌리와 함께 춤을 춘다.
그 장면은 단순한 연출을 넘어 현실과 작품이 만나는 순간처럼 느껴졌다. 특히 현재 유니버셜 수석무용수로 활동하고 있는 임선우 발레리노를 보며, 감히 '빌리 엘리어트 그 자체'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공연이 끝난 뒤 왜 이렇게까지 깊은 감동을 받았는지 다시 생각해 보았다. 빌리는 결국 자신의 재능을 발견하고 꿈을 이루어 가는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하지만 내가 감동받은 것은 단순한 성공담 때문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오히려 내 마음을 움직인 것은 빌리가 자신의 꿈을 발견하는 순간이었다.
누군가는 평생을 살아도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찾지 못한다. 무엇을 위해 노력하고 싶은지, 무엇을 위해 시간을 쏟고 싶은지, 무엇이 자신을 설레게 하는지 모른 채 살아가기도 한다. 그런데 빌리는 우연처럼 발레를 만난 순간, 그것이 자신의 삶을 뒤흔들 만큼 소중한 것임을 본능적으로 알아본다. 그리고 그 마음을 끝까지 놓지 않는다. 누가 반대하든, 얼마나 힘들든, 결국 빌리를 움직인 것은 춤을 추고 싶다는 마음이었다.
어쩌면 공연을 보는 내내 내가 가장 크게 느낀 감정은 감탄보다 부러움이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저렇게까지 무언가를 사랑해 본 적이 있었을까. 누가 반대해도 포기할 수 없을 만큼 좋아하는 일이 있었을까. 몇 년의 시간을 기꺼이 쏟아부을 수 있을 만큼 간절한 꿈이 있었을까. 인생을 돌아보면 아직은 선뜻 답할 수 없는 것 같다. 그래서 더욱 빌리가 눈부셔 보였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빌리 엘리어트>가 오랫동안 사랑받는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닐까.
이 작품은 단순히 발레를 좋아하는 소년의 성장기가 아니다. 우리에게 계속 질문을 던진다.
나는 무엇을 사랑하는가. 나는 무엇을 위해 노력할 수 있는가. 그리고 나는 무엇 앞에서 간절해질 수 있는가.
공연장을 나선 뒤에도 그 질문은 오래도록 마음속에 남아 있었다. 아직은 그 답을 찾지 못했다. 하지만 언젠가 나에게도 빌리가 발레를 만났던 순간처럼, 설명할 수 없을 만큼 마음이 움직이는 일이 찾아온다면 좋겠다. 그리고 그때는 빌리처럼 망설이지 않고 온 마음을 다해 달려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무대 위의 빌리들을 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초등학생의 나이에 수개월 동안 고강도의 훈련을 견디고, 노래와 연기, 발레와 탭댄스, 아크로바틱까지 익혀 수많은 관객 앞에 서는 아이들. 그들이 흘렸을 땀과 노력은 어쩌면 작품 속 빌리의 이야기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빌리 엘리어트>의 빌리들은 단순히 빌리를 연기하는 배우가 아니라, 각자의 방식으로 또 다른 빌리 엘리어트를 살아가는 사람들처럼 느껴졌다.
이 세상에서 자신만의 춤을 발견한 나의 빌리들. 앞으로도 오래도록 행복하게 춤추기를, 그리고 그 반짝이는 순간들이 계속 이어지기를 진심으로 바라게 되는 밤이었다.
